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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자 뚜껑으로 통과시킨 3선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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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9월 14일. 새벽 3시.

국회의사당 부근 반도호텔 301호실에 투숙하고 있던 공화당 A의원은 설핏 쪽잠이 들었다가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깼다. 

원내 부총무 K의원에게서 온 전화였다.

“어이! 뭐해요? 지금 모두 별관 쪽으로 가고 있으니 빨리 내려와요!”

다급한 목소리였다. 옆을 보니 B의원은 아직 곤히 자고 있었다. 양복 윗옷만 벗어두고 바지는 입은 채였다.

“여보우. B의원. 일어나요! 내려오랍니다.”

“응?”

눈을 비비며 일어난 B의원. 잠시 여기가 어딘가, 하는 표정으로 있다가 화들짝 일어나 윗옷을 집어 들고 A의원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같은 시각에 연락을 받은 다른 의원들도 호텔 이 방 저 방에서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로 가요?”

“쉿! 의사당 맞은 편 제3별관 3층 특별회의실이랍니다.”

그때 반도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의원들은 공화당과 친여 무소속 의원을 포함해 모두 122명이었다. 그들은 야음을 틈타 마치 군사작전이라도 감행하듯 캄캄한 밤거리를 걸어서 별관 쪽으로 향했다. 통행금지 시간이라 차도 사람도 없는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좁은 별관에는 이미 다른 의원들과 의원 보좌진으로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차있었다. 그 시간 야당의원들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지금도 국회의사당 단상을 점령하고 밤샘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A의원은 괜히 뒷목이 근질거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회의실 정면에는 작은 단상이 있었고, 단상 뒤에는 이효상 의장을 비롯한 공화당 지도부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뒤로 정보부에서 온 듯한 사내들이 서있는 게 보였다.

“에~ 지금부터 현행 대통령 중임제를 세 번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상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원님들은 각자 내용을 잘 숙지하시고 착오없이 협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효상 의장의 개회 선언에 이어 개헌 헌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 그대로였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모두 말은 없었지만 내일 아침이면 온 신문이 이것으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거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3선개헌안! 여당 단독 날치기 통과!’ 

그리고 벌어질 일들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A의원은 눈을 감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재작년 1967년 6월 8일 제 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가 대통령 박정희에게 유난히 중요했던 것은 바로 그들 회기 중에 삼선개헌을 해야 차기 71년 대선에 다시 대통령으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반드시 개헌 가능한 의석을 확보해야했다. 이승만 시대 때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에게 종신 대통령의 길을 열어준 것과 같은 이치였다. 온갖 탈법과 무법, 불법이 동원되었다.

그 결과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은 총 175석 중 130석, 개헌을 위한 3분의 2선을 훌쩍 넘는 의석을 확보하였다. 당연히 부정선거규탄대회가 연일 벌어졌다. 박정권은 휴교령으로 맞섰다. 전국 31개 대학과 163개 고등학교가 그 대상이었다. 박정희 집권 시절 내내 휴교령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었다. 학생들의 공부를 걱정하는 대신 아예 저항의 근거지인 학교의 문을 닫아버리겠다는 군인다운 발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중에도 그나마 면면히 이어지던 3선개헌 기도 반대와 부정선거 규탄운동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 다음 해 1월에 발생했다. 

전년, 그러니까, 1968년 1월 21일. 

북한특수부대 소속 김신조 일당 21명이 세검정 고개를 넘어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1월 21일에는 미해군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나포되었다. 연이어 그해 11월, 울진 삼척 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120명과 국군이 전투를 벌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런 일련의 사건은 북한의 무모한 도발에 의해 벌어진 불행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박정희에게 장기집권을 설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해 4월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내 고향은 내가 지킨다는 명분하에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자 저항의 근거지인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창설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3선개헌이라는 산 하나 뿐이었다. 삼선 개헌 후에는 장기집권, 즉 유신체제로 가는 탄탄대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헌법을 고쳐서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될 생각이 절대로 없다. 내가 3선개헌을 하려 한다는 것은 정치적 모략이다.”

그랬던 대통령 박정희는 1969년 7월이 되자, “여당은 빠른 시일 내 개헌안을 발의하고, 야당은 합법적으로 반대운동을 펴달라.”고 당부 아닌 당부를 담은 말을 뱉어내었다. 합법적인 반대 운동? 지금이나 그때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휘둘러대는 법 앞에서 무엇이 합법이고 무엇이 비합법인지 구분이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아무 짓도 하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서울대 법대생들이 가장 먼저 들고 일어섰다. 

법대 자유의 종 앞에 모인 500여명의 학생들은 이른바 ‘헌정수호 학생총회’를 개최하여 어떠한 개헌 음모도 분쇄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4월의 피는 어디로 갔는가? 4월의 정신은 언제 어디서 사라지고 말았는가? 우리는 5.16이 후진국가에서 흔히 발생하는 반민주적인 군부 쿠데타라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4.19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그들의 강변에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부정과 권력이 난무한 6.8 선거가 바로 이들에 의해 계획된 개헌을 위한 예비음모였다는 것을 참으로 이제야 깨닫는다. 개헌을 하지 않겠다던 재차에 걸친 그들의 공약이 대중을 기만하기 위한 술책이었음이 이제야 완전히 입증되었다. 이미 집권욕에 불타올라 충혈된 그들의 안중에는 대중에 대한 신의나 민주주의나 준법이란 말은 한갓 가소로운 수식어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드디어 그들은 민주주의 최후 저지선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바야흐로 조국의 민주주의는 사멸의 문턱에 도달하였다! 학우여, 비장한 각오로 대열을 정비하자!”

서울 법대생의 집회 소식은 곧 전국의 각 대학으로 전해졌다. 전국 대학에서 연이어 시국선언 대회와 성토대회가 터져 나왔다. 남북간의 충돌로 반공과 안보논리가 득세하면서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던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다시 불을 댕긴 것이었다.

시위는 갈수록 격화되어 7월 1일에는 8천여 명이, 7월 2일에는 6천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강경하게 진압작전을 펼쳤다. 정부도 바쁘게 움직였다. 예상대로라면 순탄하게 개헌을 단행해야할 시점에 예상 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던 것이다. 아무리 김신조가 넘어오고, 푸에블로호가 납치되고, 울진 삼척에 무장공비가 와도 민주주의를 지켜야하겠다는 국민적 열망은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승만 독재 하에서 이미 그런 경험을 겪을 대로 겪어본 국민들이었다.

7월 8일 전국 29개 대학이 일제히 조기방학을 실시하였다.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만 해도 민주투쟁의 주력부대였던 대학생들은 낭만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사회에서 민주 운동 세력도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3선개헌반대투쟁은 자연히 소강상태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방학 중에 일어난다. 당시 정가에서 우스개처럼 떠돌던 말이었다.

박정희와 그 추종 세력인 공화당은 대학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7월 8일 기다렸다는 듯이 대통령 연임과 국무위원 국회의원 겸직을 골자로 하는 3선개헌안을 발의하였다. 44명 밖에 되지 않는 야당 국회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일부 소위 항명파 의원의 저지 기도가 있었지만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권력 집단은 이미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9월 14일, 새벽. 국회별관 특별회의실. 

이효상 의장의 말이 이어졌다.

“에~ 방금 들으신 바대로 헌법 개정안이 상정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뭐, 모두 잘 아시리라고 믿고, 별다른 토론 없이 그냥 투표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때요?”

“좋습니다!”

이미 짜놓은 각본대로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토론 없는 투표? 헌법 개정이라는 이토록 중요한 안건에 대해 한 마디의 토론도 있을 수 없다니? A의원은 답답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보부를 앞세운 군사정권의 폭력이 두려웠고, 또 한편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마음도 없지 않았다. 국회만 통과되면 나머지는 충성파 인사들이 모두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일개월 후 있을 국민투표라는 것도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눈가림용이란 건 누구나 뻔히 아는 사실이었다.

“자, 그럼. 찬반 투표를 하겠습니다. 먼저 상정된 안에 대해 반대하는 의원들은 손을 들어주세요.”

아무도 없었다. 

“그럼, 모두 찬성하신다는 뜻이죠? 자, 그럼 통과된 걸로 하겠습니다. 건데 이봐 의사봉 어디 있어?”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려고 보니 주전자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황급히 진행하느라 사무처에서 미처 의사봉을 준비해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이런! 모자란 사람들 같으니라구!”

이효상 의장은 혀를 차더니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주전자 뚜껑을 벗겨 들고 탁자를 탕, 탕, 탕 세 번 두드렸다.

이렇게 하여 그날 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열어줄 역사적 3선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어두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조종이 한반도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박정희와 술친구를 하기도 했던 시인 구상은 그때를 이렇게 아프게 시로 썼다. 

“그는 샤먼이 되어 있었다./ 그 장하던 의기가/ 돈키호테의 광기로 변하고/ 그 질박했던 성정이 방자로 바뀌어져 있었다./ 오랜 역려에서 돌아온 나는/ 권좌의 역기능으로 굳어진 그 친구를 바라보며/ 골동묘지의 갈가마귀 떼처럼/ 활자마다 지저귀는 신문과/ 신의 무덤에 나아가/ 까마귀 떼처럼 우짓는 군중 속에서/ 원기가 없어 더욱 가슴 아팠다.”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