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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S로 세상을 지배한 요지경 5공화국

정권 안보 차원에서 진행된 관제 문화 행사 ‘국풍81’

1981년 5월 27일, 서울대학교 도서관 광장에서는 5.18 1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침묵시위가 진행되던 오후 3시경, 도서관 6층 옥상에서 경제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친 뒤 스스로 옥상에서 몸을 던져 사망했다.

“이럴 수가! 이따위 쓰레기 기사로 김태훈 열사를 두 번 죽게 하다니!”

다음날 이른 아침, 인사동의 한 조그마한 식당에서 모처럼 친구 J를 만난 P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서울대 학생의 죽음을 단순한 투신자살로 처리한 1단 기사를 발견하고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8일자 주요 신문 사회면에는 '국풍81 화려한 개막'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농가로 내려와 꿀통을 훔쳐 먹다가 사살된 반달곰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P와 J는 해직기자가 된 뒤부터 부쩍 자주 만나게 된 사이였다. 그들은 전날 밤의 숙취를 달래기 위해 해장국에 막걸리를 시켜 먹는 중이었다.

“서울대생 사건을 국풍과 반달곰으로 뒤덮는 전략이군. 이게 다 H의 작품이겠지?”

“내 눈으로 안 봤으니 알 수 없잖아. 그렇지만 요즘 운동권 학생들 때문에 청와대의 높으신 분이 골치깨나 썩인다고 들었어. H가그분한테 잘 보이려고 신문사 사장들에게 으름장을 많이 놓는다고 하더군. 모두들 알아서 기는 것도 웃겨. 언론인이 깡다구도 없나?”

그들이 말하는 H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5공의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어휴! 1980년 11월 언론 통폐합 때의 일을 생각만 허면 지금도 천불이 난다니까.”

“그때 일을 떠올리면 나도 속이 뒤집혀. 그 일로 전국의 신문사 11개, 방송사 27개, 통신사 6개 등 도합 44개의 언론매체가 통폐합되었으니, 말 그대로 폭거 아닌가?”

두 사람은 그때 떨려난 일을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그 무렵 H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대한민국의 언론 매체는 모조리 쑥대밭이 되었다. 그는 언론사의 고위직 앞에서 으레 “광고를 막아 볼까?”, “회사 문을 닫게 할 수도 있지.”라는 언사를 자주 했다고 한다. 언론사 사주는 H 앞에서 오금을 펴지 못했다. 언론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둥두둥 두둥둥둥둥.”

그날 오전 10시, 드넓은 여의도 광장에 대고(大鼓)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풍81’이 시작된 것이다. 겨레의 민속 대잔치를 표방하며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닷새 동안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국풍81’은 전형적인 관제 행사였다. 

“이건 말이야, 12.12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뒤 광주학살의 비극을 저지른 이 정권의 실정을 감추고 군사정권에 대한 학원가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한 간계라니까.”

“맞아. 국민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이 일을 꾸민 것도 H라더군.”

식당에 마련된 텔레비전에서는 ‘국풍81’ 행사가 벌어지는 여의도의 모습이 중계되고 있었다. 여주 신륵사에서 옮겨왔다는 직경 2미터가 넘는 대고의 크고 맑은 북소리가 여의도 광장에 울려 퍼지자, 구름처럼 모인 시민들이 박수와 환성을 질렀다. 이어, 개막행사인 지신밟기를 비롯해 다양한 문화 공연이 펼쳐졌다. 이 행사를 위해 전국 198개 대학 6천여 명의 학생과 일반인 7천여 명이 참가했고, 전통 민속인과 수많은 연예인들이 참여해 모두 659회의 공연이 벌어졌다. 총 1천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고 관람한 ‘국풍81’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듣자 하니, H는 이 관제적 성격의 문화 행사를 돋보이게 하고자 유명짜한 문화계 인사들을 회유하려 했다더군.”

“모두 거절당했다지? 그렇지만, 대중들의 눈과 귀를 한 곳에 모으는 데에는 나름대로 성공했지. 이 썩을 놈의 세상!”

그들은 몇 잔씩 들이키던 해장술에 혀가 조금씩 꼬부라지기 시작했다.

프로야구 탄생과 에로 영화 전성시대

'국풍81'이 끝나고 이태가 흐른 어느 날 오후, J와 P는 다시 만났다. 그들은 피맛골의 한 허름한 선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요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다. 

“머지않아 프로야구가 만들어질 거라더군.”

“응, 나도 신문에서 읽었어.”

“근데 말야, 속도전으로 밀어붙인다는 생각 안 해 봤나?”

J가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P도 덩달아 주위 눈치를 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속도전?”

“이번 일도 H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라던데. ‘빵과 서커스’를 재료로 해서 말이야.”

“빵과 서커스? 아하! 우민화 정책 말이군. 로마 황제들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 경기를 성대하게 열곤 했지. 경기를 관람하는 로마 시민들에게 빵을 주어서 모든 시름을 잊게 했던 것 말일세.”

“바로 그것일세. H의 전략은 먼저, 영화산업을 키우는 것일세. 법적 규제를 풀어 에로 영화를 많이 만들게 하면 스크린과 섹스라는 두 마라의 토끼를 잡을 수 있지. 그 다음, 국내에 프로 스포츠를 도입해 국민들을 열광하게 만들어서 스포츠를 활성화하는 것이네.”

“알겠네. 대학생과 국민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로 눈과 귀를 사로잡으려는 것이 되겠군.”

“정권의 실세가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기업들에게 세제상의 혜택을 주겠다고 유혹했다더군. 이 제안에 여러 기업들이 군침을 흘렸겠지? 그런데, 세제상의 혜택이 법규상에 어긋난다며 재무부가 제동을 걸었다네.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겠나?”

“어떻게 되긴. 정부 고위 관료가 재무부로 전화를 걸어 엄포를 놓음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던데.”

J와 P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안주 삼아 이야기에 열을 올리다가 늦은 시각에야 귀가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든 풍문이든 간에 모종의 프로젝트는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3S정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빗장이 하나씩 풀려 나갔다. 맨 먼저 시민들의 불편 사항을 해결해 준다는 명목으로 통금이 해제되었다. 유흥업소의 심야 영업 금지도 해제되었다. ‘정치에 관심 두지 말고 마음껏 먹고, 놀고, 즐겨라’는 3S정책은 영화의 검열 완화로 이어졌다. 수위 높은 에로물을 검열에서 통과시키려는 방편이었다.

1982년 2월 6일, 종로 3가에 위치한 서울극장에는 사상 최대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영화 '애마부인'이 개봉된 날이었다.

“처음부터 끝가지 농염한 장면이 넘쳐난다는군. 어떤 영화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기대감과 호기심을 드러냈다. 농도 짙은 에로 영화를 구경한다는 설렘과 흥분이 겹쳐 극장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극장 유리창이 깨질 정도의 인파’가 몰려든 데에는 서울극장이 최초로 심야극장을 개봉한다는 홍보도 한몫을 했다. 이 영화는 무려 4개월간 315,000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사상 최대의 흥행몰이에 성공한 '애마부인' 이후 한국 영화계는 '변강쇠' '뽕' '탄야' '산딸기' 등 에로 영화의 전성기가 열려 국민들의 말초적 관심을 자아내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그 무렵, 재무부는 '대통령 각하의 지시 사항에 관한 협조전'이라는 제목의 서류를 국세청에 보냈다. 이 서류에는 “기업이 프로야구단에 투자한 금전은 기업의 광고 선전비로 처리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광고할 돈으로 프로구단을 운영할 수 있다는 설명은 매력 그 자체였다. 이 파격적인 세제상의 혜택에 눈이 번쩍 뜨인 기업들은 저마다 구단 창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 뒤 서울의 MBC 청룡, 부산의 롯데 자이언츠, 대구의 삼성 라이온즈, 대전의 OB베어즈, 광주의 해태 타이거즈, 인천의 삼미 슈퍼스타즈 등 6개 구단으로 구성된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와! MBC 청룡 선수들 멋있다!”

“아니야,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이 더 멋있어!”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야구장)에서 3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이 열렸다. 경기가 시작되자, 관람객들은 역사상 처음 열리는 프로야구 개막전을 구경한다는 흥분에 사로잡혀 동대문구장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응원을 했다. 이후, 한국 프로야구는 관객몰이에 성공함으로써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국민들이 3S정책의 독성에 마비되어 갈 무렵, 각 언론사에는 정부의 모처로부터 은밀한 문건들이 배달되었다.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기사 보도를 위한 가이드라인 문건인 보도지침이 시달된 것이다. 정부의 입맛에 따라 기사 작성이 유보되거나 거부되는 미증유의 언론 학살이었다. 이로 인해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언론의 암흑시대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1986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는 1985년 10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문공부가 각 언론사에 내려 보낸 보도지침 584건을 확보했다. 같은 해,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이 자료를 토대로 9월 6일 발행된 《말》지 특집호를 통해 보도지침의 실체를 폭로해 세상에 알렸다. 이 보도지침사건은 1987년 6월민주항쟁의 견인차 역할을 했고, 3S정책 또한 5공 정권의 침몰과 더불어 종말을 맞았다.

6.29선언이 있은 뒤의 어느 볕 좋은 날, 모처럼 탑골공원 근처에서 만난 J와 P는 힘차게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이제 정말 새로운 세상이 온 것일까?”

“우리가 좀 더 힘을 내야 하겠지. 하여튼, 오랜만에 어디 가서 국밥이나 먹세.”

그들은 하늘을 향해 한바탕 웃어젖힌 뒤,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