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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길어올린 불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와 위대한 시민들의 항쟁

1980년 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열망을 무시한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광주에 주둔한 계엄군은 일요일인 5월 18일, 아침부터 전남대 학생들을 커다란 진압봉으로 내리치고 군홧발로 짓뭉갰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의 시작이었다. 이튿날 오후, 계엄군에 의한 최초의 발포가 있은 뒤, 21에는 자위권 차원에서 시민군이 형성되었다.

‘이 나라의 운명이 장차 어찌 되려는가?’

참혹한 현실을 목격한 서른세 살의 청년 시인 김준태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194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대 독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1969년  『시인』지에 시 <참깨를 털면서>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한 다음, 활발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었다. 

시민군들은 총을 들고 스스로 광주를 지켰다. 시외전화가 차단된 고립무원이었지만 양보와 배려와 존중이 도시를 지탱해 주었다. 시민들은 피로 얼룩진 거리 곳곳을 쓸고 닦으며 청소를 했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날, 도청 앞 상무관에 마련된 빈소에는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은 시신들을 모셔 둔 관이 즐비했다. 분향하러 온 시민들은 긴 줄을 이루었고, 여고생들은 흰 국화꽃을 바치며 훌쩍였다. 김준태는 빈소를 나오면서 ‘신은 죽었다’며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시를 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대인시장이나 양동시장의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병원에서는 부상자를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해방구가 된 광주에서는 강력사건과 도난 사건이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광주의 불길 속에서 완성한 장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준태! 광주의 참혹한 실상을 시로 써주면 좋겠네. 내일 아침 신문 1면에 실릴 걸세.”

1980년 6월 1일 오전 9시경, 전남매일신문사의 문순태 부국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일곱 살 위의 선배 소설가였다. 김준태가 “형님, 시를 못 쓰겠어요.”라고 하자,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우리는 역사의 증인 아닌가? 진실을 꼭 알려야 하네.”라고 말했다. 김준태는 결국 승낙했다.

“5.18의 참상을 제대로 표현하는 시를 실어야 합니다.”

비상편집회의를 소집한 신용호 국장의 강력한 주문에 따라 문순태가 급히 김준태에게 원고 청탁을 하게 된 것이다. 오후까지 완성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김준태는 책상에 앉아 만년필을 들었다. 원고지의 빈 칸에서 무수한 영상들이 꿈틀거려, 단 한 글자도 나아갈 수 없었다. 도청 앞에서, 금남로에서, 충장로에서 계엄군에게 도륙당하는 시민들의 절규와 함성, 총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자, 거짓말처럼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그 시각, 김준태는 금남로의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민들과 함께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군과 대치중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으윽! 아아악!”

바로 옆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열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동시에 픽픽 쓰러졌다. 공포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총성이 울리자 시위대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김준태도 이들과 한데 섞여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시민들이 뛰어가 부상자를 들것에 실었다. 구조원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 부상자들을 근처 병원으로 데려갔다.


              하느님도 새떼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어떻게……국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쏠 수가 있는가?”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인도에는 가두 화분이 넘어져 나뒹굴고, 도로에는 널브러진 자동차가 불에 탄 채로 검은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오후 5시경, 시민군은 격렬한 저항 끝에 계엄군을 광주시 외곽으로 쫓아냈다. 피의 항쟁 나흘 만에 광주를 되찾은 것이다. 시는 이 대목 이후 거침없이 나아갔지만 김준태의 가슴을 온통 절망으로 뒤흔들어놓은 곳은 따로 있었다.

도청 앞 집단 발포가 있던 바로 그날 저녁, 김준태는 동료 교사의 아내 최미애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사실을 전해 들었다. 김준태는 사선을 뚫고 빈소를 찾아갔다. 1학년 2반 담임을 맡고 있던 영어 교사 김충희는 반쯤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제 아내는 시내에 나간 저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M16에 머리를 맞았어요. 임신 8개월이었는데, 머리 대부분이 날아가서…….”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그들은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 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난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비통해하는 동료 교사의 모습을 떠올리자, 펜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터져 나오는 슬픔을 막고자 괄호 처리를 했다.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죽음 속에서 부활하는 광주의 희망을 마지막 연으로 처리함으로써, 김준태는 시를 쓴 지 1시간 만에 신들린 듯이 105행에 달하는 장시를 썼다. 광주의 억울한 영령들이 힘을 보태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고를 챙겨들고 편집국으로 달려갔다.

“김 시인! 정말 고맙네. 가히 세상을 울릴 만한 시일세.”

시를 읽은 문순태는 눈물을 글썽였다. 신 국장은 “바로 이것이다!” 하고 소리치며 기뻐했다. 김원욱 사회부장은 “광주 5.18을 제대로 표현한 시가 탄생했다.”고 감격스러워하며 시 게재를 밀어붙였다. 시는 계엄사의 사전 검열로 붉은 줄이 죽죽 그어져 71행이 뭉텅 잘려나가고 34행만 게재되었다. AP, 로이터통신 등 외신 기자들에 의해, 삭제되지 않은 시 전문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한 달 간 잠행하던 김준태는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재직 중인 전남고등학교에서 쫓겨났다. 전남매일신문은 그해 11월 언론사 통폐합으로 폐간되었다. 하지만, 광주항쟁의 불길 속에서 탄생한 장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오늘날까지도 1980년 광주의 비극을 생생한 언어로 형상화한 감동의 명시로 우뚝 서 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