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국민이 주인인 신문이 필요하다, 한겨레신문 창간

“또 그놈의 땡전이구먼.”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김 씨가 혼자 중얼거렸다.

“땡전이 뭔가?”

친구 박 씨가 물었다.

“아, 땡전도 몰러? 자네는 뉴스도 안 보는구먼. 텔레비 아홉시 땡, 하고 뉴스를 시작하던 첫 소리가 전두환 대통령께서는...하고 시작하잖여. 그래서 다들 땡전이라고 하는거여. 알겠어?”

“아하, 그래서 땡전이라...”

박 씨가 비로소 알았다는 듯이 헛웃음을 날렸다.

때는 서슬 퍼런 5공 시절이었다. 이른바 <보도지침>이란 것이 매일매일 신문사와 방송국 데스크로 배달되었다.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란 데서 각 신문 방송국 편집책임자와 보도책임자에게 은밀히 전해지는 내용이었다. 권력 뒤에 숨은 누군가가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관계없이 보도여부는 물론 보도방향과 보도의 내용 및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 '가(可), 불가(不可), 절대불가'의 지시를 내리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심지어는 어떤 기사를 어떤 내용으로 어느 면 어느 위치에 몇 단으로 싣고, 제목도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사진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또는 사용해야 하고 당국의 분석자료를 어떻게 처리하라는 등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다보니 각 신문의 논조는 물론이거니와 일면 톱기사 제목까지 똑같이 나오는 웃지 못 할 상황까지 벌어지곤 했다. KBS, MBC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땡전’ 같은 유행어가 우스갯소리 삼아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절대적인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이 은밀한 권력과 언론의 야합은 한 용기 있는 언론인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이른바 자유민주국가라는 대한민국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보도지침> 사건이었다. 국민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기만 당하고 있고, 눈과 귀를 도둑질 당하고 있다는 깊은 모멸감과 자각을 뼈 속 깊이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에겐 우리들의 신문이 필요하다!’

‘그렇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문. 진실을 전해 줄 진짜 언론이 필요하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문. 진짜배기 민중들의 소리를 담은 언론. 

그것은 언론인 성유보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바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그는 언론사들의 썩은 부분을 속속들이 체험해서 알고 있었다. 정권과 유착된 사주의 배를 불리기 위해 기자는 한낱 그들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그들 앞에 무력해질대로 무력해진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양심적인 기자들은 하루아침에 쫒겨나 거리의 낭인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은 죽었고, 양심적인 기자도 사라졌다. 그때 한국일보의 초짜배기 기자 김주언이 감옥 갈 각오로 데스크를 통해 은밀히 내려오던 <보도지침>을 복사해 만천하에 알렸던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성유보는 마포에서 출판사를 하는 신홍범을 찾아갔다. 그 역시 조선일보 해직기자 출신이었다.

“신형! 어떻게 생각해? 우리도 경험했지만 제도언론을 바꾸는 일은 요원한 일 같애. 정권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사주들이 제대로 된 기자를 키워줄 일은 만무하고...”

주름살 많은 성유보의 얼굴에 슬핏 비장한 빛이 스쳤다. 

“그러면...?”

“이 시대에 맞는 국민적 신문을 만들자는 거네. 우리 손으로,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신문 말일세.”

“음.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당장 돈이 있어야하지 않은가.”

“이왕이면 명실상부 국민의 신문답게 범국민적 모금을 해야지. 지금 분위기로 봐선 분명 호응이 있을거야.” 

“음.”

키가 크고 신사답게 생긴 신홍범은 이마를 한번 손으로 쓸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 모두가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일인지도 몰랐다. 입사 초기 외신부장이었던 리영희 선생이 준엄한 목소리로 '기자는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해야 하고, 진실만을 써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군사독재 치하에서 순치될 대로 순치된 제도권 언론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겠네. 그럼 하루빨리 송건호 선생을 비롯하여 민언협 친구들의 의견을 모아보세나.” 

뜻이 있으면 길이 생긴다는 말처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갔다. 성유보는 민언협(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해직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그동안 재야 운동에서 익힌 솜씨를 십분 발휘해 착착 논의를 진행하고 뜻을 모아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보도지침> 사건도 있었고, 그해 6월민주항쟁도 경험 하였고, 직선제 대선을 앞두고 있어 새 신문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높았다.

성유보는 민언협 사무실로 돌아와 김태홍, 임재경, 임채정 등 해직기자 출신의 기라성 같은 선후배들과 의논하고 뜻을 모아갔다.

마침내 1987년 10월 30일, 해직 기자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창간 발기선언대회를 열어 국민신문의 역사적 출범을 선언하였다. 곱게 흰 한복을 차려입은 함석헌 선생과 신경림 시인, 성내운 선생, 이태영 선생 등이 맨 앞줄에 자리하였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민언협 이사장 송건호 선생이 낭낭한 목소리로 창간 발기문을 읽어나갔다.

“...우리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새로이 열어야 하는 중대한 전환점에 서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을 유린해 온 오랜 독재체제를 청산하고 사회 구석구석 만연해있는 비민주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국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고, 분단을 극복하여 민족의 평화 통일을 성취해야할 중대한 과업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의 가장 강력한 수단의 하나가 누구나 자기의 현실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민주적 언론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발기선언대회는 대성공이었다. 

신문 이름은 가칭 ‘한겨레신문’으로 하기로 하고, 국민주 모금방식도 정해졌다. 1주당 액면가를 5천원으로 하고 2주 1만원을 하한선, 그리고 1만주 5천만원을 상한선으로 정했다. 가능한 한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고 지배주주가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새로 나올 신문의 편집형태와 방향은 기존의 신문과는 완전히 달라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신문체제는 한글 가로쓰기를 실현하며 국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표현할 것을 천명하였고, 소속 기자들도 해직 언론인 일부와 현직 기자 일부를 포함해 기자 정신에 투철한 사명감 있는 기자를 중심으로 구성할 것을 약속했다.

모금은 삽시간에 이루어졌다. 처음 목표했던 50억원을 거뜬히 넘겼던 것이다.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인사들뿐만 아니라 구멍가게 아저씨, 주부, 학생들도 십시일반 이 새로운 국민 신문의 창간 모금에 동참하였다. 그만큼 진실에 목이 말라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맨땅에 헤딩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사옥을 마련하고 각종 설비를 들여놓고, 각 부서를 정해 새로운 팀을 짜고 손발을 맞추는데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성유보를 비롯한 창간 멤버들은 마포 새 사옥에서 꼬박 밤을 지새우며 창간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해 치러진 겨울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노태우가 당선됨으로써 평화적 정권교체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모두가 깊은 좌절에 빠져 있을 무렵이었다. 이런 때일수록 올바른 정보를 공유하고 준엄한 시각으로 시대를 앞서갈 공식적인 매체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창간 멤버들은 자신들의 어깨에 매겨진 무거운 과제를 온몸으로 실감하며 한편으론 설레는 마음으로 주야를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그리하여 1988년 5월 15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국민의 신문, 국민이 주인인 <한겨레신문> 창간호가 1면에 가득 백두산 천지의 사진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송건호 선생이 발행인이 되고 성유보는 초대 편집위원장을 맡았다. 

오랜 관제 언론의 사슬에서 벗어난 대한민국 언론의 새 역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