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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과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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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뚫고 일어서는 사랑의 손길

1980년 5월 18일 아침, 조아라 광주 YWCA 회장은 이애신 총무, 김경천 간사와 함께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광주고속터미널까지 오는 동안 완전 무장을 한 계엄군이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는 광경을 여러 번 보았다.

“아이고, 군인들이 학생들을 사정없이 때리는구먼. 살이 다 떨리네.”

“회장님! 대체 이게 웬 난리랍니까? 아아, 정말 무서운 세상이에요.”

조 회장과 이 총무, 김 간사는 버스 안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19일 하와이로 떠나는 Y연합회 박에스더 고문을 전송한 뒤 20일 오전 11시경 광주로 내려왔다. 시내버스는 운행을 중단한 상태였다. 무등경기장에서부터 시내로 걸어가 금남로에 접어들었을 때, 공수부대원들이 70센티미터에 달하는 쇠심 박힌 곤봉으로 청년들을 잔인하게 후려치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들은 피에 굶주린 야수의 눈빛을 번뜩이며 다방이나 상점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끌고 나와 폭행했다.

“어찌 이럴 수가…….”

조아라는 끔찍한 만행을 보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금남로는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바뀌고 말았다. 조아라는 이 총무, 김 간사와 함께 광주천변 우회로를 통해 간신히 집으로 갔다. 살아 돌아온 것이 기적이었다.

21일 오후 1시 정각,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했다. 10여 분 동안 수백 발의 총탄이 난사되면서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때부터 광주의 시민들이 자위를 위해 무장을 했으며 나주와 화순 등에서 탈취해온 무기를 들고 계엄군들과 싸웠다.

이날 오후 집에서 나온 조아라는 곧장 기독병원으로 가서 Y의 여러 실무자들과 더불어 헌혈 운동을 벌였다. 병원 앞에는 헌혈하러 온 학생,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기독병원에서 헌혈을 마치고 귀가하던 박금희 학생이 계엄군의 총격에 병원 마당에서 즉사했다. 병원 안에 있던 시민들은 피투성이가 된 여학생을 둘러싸고 울부짖었다.

시민군의 저항이 치열해지자, 이날 자정 무렵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물러갔다. 나흘 동안의 항전 끝에 도청을 접수한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계엄군들이 버리고 간 잡동사니들을 말끔히 청소했다.

22일 아침, YWCA로 출근한 조아라는 홍남순 변호사와 연락을 한 뒤 남동성당 김성용 신부를 찾아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조아라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기독병원과 적십자병원 등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부상자를 돌보고 사망자 처리를 위한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조아라는 이애신 총무와 김경천, 안희옥 등 Y의 여러 간사들에게 쌀이나 라면 등 구호품을 모아 오게 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함께 전달하면서 부상자 가족과 사망자의 유족을 위로했다.

이에 앞서 도청에서는 정시채 부지사를 중심으로 수습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으나, 총기 회수를 주장하는 등 계엄사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한 결과를 발표하자 시민들의 반발을 샀다. 이 때문에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남동성당에서 조아라 YWCA 회장, 김성용 신부, 홍남순 변호사, 조비오 신부, 명노근 교수, 송기숙 교수, 이애신 YWCA 총무, 이성학 장로, 이기홍 변호사, 이영생 YMCA 이사, 위인백 등 민주인사들이 연달아 회합을 함으로써 정식으로 재야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도청에 모여 결의사항을 발표했다.

“계엄군은 시내 진입을 하지 말라. 광주민중항쟁은 계엄군의 살상에 대한 시민들의 정당행위이므로 공수단의 책임자를 처단하라. 구속학생들을 석방하라. 그동안 시위에 가담한 시민들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쳐라.”

계엄사는 재야수습대책위원회의 어떠한 요구 조건도 들어주지 않았다.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학생과 청년수습대책위가 주관하여 회의를 개최했고 조아라는 YWCA 회장 자격으로 이 모임에 참석했다. 무기 회수냐 항전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26일 오후 6시경 조아라, 이애신, 윤공희 대주교 등 민주인사들과 정상용, 김종배, 김창길 등을 비롯한 여러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마지막 회의가 열렸고, 격론 끝에 무기 회수파가 도청을 빠져나왔다. 윤상원과 박남선 등은 기동타격대와 함께 도청에 남아 끝까지 항전하기로 했다. 밤 8시경 조아라는 조비오 신부, 전남대 오병문 교수 등과 함께 도청에서 나와 YWCA로 갔다.

27일, 공수부대원들의 대대적인 충정작전 끝에 계엄군이 도청을 접수하고 광주를 장악했다. 29일 새벽 6시, 조아라는 형사들에 의해 연행되어 광주경찰서, 상무대 헌병대로 끌려갔다. 같은 시각 재야수습대책위원들도 계엄사로 끌려가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 항쟁파를 지지한 남동성당 강경파로 몰려 보안대로 끌려간 조아라는 김대중 내란음모에 관련된 조사를 추가로 받은 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했다.

“5·18은 만들어낸 사람이 따로 있고 우리는 피해자일 뿐이다. 하나님과 역사는 준엄한 심판으로 어느 때인가 그 진실을 밝혀 주실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조아라는 곧바로 YWCA회관으로 갔다. 회관 건물 본관과 사택은 집중사격을 받아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회관 안에 있던 Y신협 직원 박용준이 흉탄에 맞아 숨졌고 신원 미상의 청년 한 명도 항쟁 기간 동안 참상을 당했으며, 신협 참사 김영철이 크게 부상당한 사실을 알게 된 조아라는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꼈다.

19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된 김영철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자가 되어 있었다. 이듬해 가을, 조아라는 간질 증세가 심해진 김영철을 데리고 전주 예수병원에서 뇌파 검사를 받게 한 뒤 전남대병원에 입원시켜 수술을 받게 했다. 이후, 조아라는 노구를 이끌고 5·18 구속자 석방운동에 전념했다. 또한, 부상당한 사람들에 대한 치료비, 부상자나 유가족들에 대한 생활비, 그 자녀들에 대한 장학금 지원 등 가장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출감 후 구속자와 부상자를 변함없이 찾아 보살피는 열정과 따뜻한 인품에 감동한 동양화단의 원로 의재(毅齋) 허백련은 조아라에게 티 없이 결백하다는 뜻의 ‘소심당(素心堂)’이란 아호를 지어 주었다.

일제하 독립운동가에서 ‘광주의 어머니’로

조아라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3월 28일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3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광주 수피아여학교 고등과 3학년생이던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일제의 탄압에 맞섰고, 1930년 2월 조선 독립을 위한 여성 비밀결사인 ‘백청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다. 이후 농촌 계몽과 인재 양성을 통해 독립을 실현시키겠다는 취지로 김구 선생과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933년 이일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 1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학교에서 쫓겨났다. 이즈음 수피아여고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다 폐교되는 와중에 조아라는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수감되는 수난을 겪었다. 해방 후, 조아라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인회를 조직했고 광주YWCA를 재건하면서 본격적인 여성운동에 나섰다.

조아라는 한국전쟁 중에는 전쟁고아를 위한 성빈여사와 불우소녀 가장을 위한 야간 중학교인 호남여숙을 설립했다. 1962년에는 청소년 야학인 별빛학원과 성매매여성 직업훈련을 위한 계명여사를 열었으며, 1965년 성매매여성을 극진히 도와준 공로로 용신봉사상을 받았다. 당시의 언론은 ‘윤락엄마노릇 10년’이라는 제목 밑에 “명실공히 조 여사는 광주의 모든 불우한 여성들의 한결같은 광주의 어머니”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붙여 주었다(조선일보 1965년 9월 26일자). 생전에 그는 5·18 희생자 명예회복과 기념사업 추진에 힘을 보탠 공로로 광주시민대상, 정일형 자유민주상, 무등여성대상, YWCA 대상 등을 받았다.

2003년 7월 8일, 평생을 봉사에 몸바쳐오며 여성의 지위 향상 및 민주·인권운동에 헌신해온 조아라는 92세로 소천한 뒤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