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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
밀항 - 해외민주화운동
1981년 4월 29일 오후, 마산 부두 정문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췄다. 차에서 내린 세 남자는 부두에 대기 중인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승선했다. 2등 기관사 정찬대와 3등 항해사 최동현은 비쩍 마른 사내를 의무실로 안내한 뒤 말했다.
“형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여기서 지내십시오.”
“고맙네.”
비쩍 마른 사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머물 곳은 의무실에 딸린 화장실이었다. 한 평 반쯤의 공간에는 양변기와 세면대가 있었고, 천장에 조그만 환기구가 있을 뿐이었다. 백열등이 꺼지면 곧바로 암흑천지였다. 그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극도로 조용히 지냈다. 출항한 지 몇 시간 뒤, 저녁이 되자 3등 항해사가 와서 말했다.
“배가 방금 우리 영해를 지났습니다.”
항해사가 나간 뒤, 사내는 벽에 기대앉아 흐느꼈다. 그러고는 노트를 꺼내어 뭔가를 적었다. <어머니>라는 제목의 시였다. 주먹으로 눈물을 쓱 닦은 사내는 자신이 쓴 시의 구절을 조용히 읊조렸다.
“5월 영령들이시여!/ 이 못난 도망자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 못난 놈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또 열심히 활동해서 살아남은 죄, 도망친 죄를 씻고/ 떳떳이 돌아올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시고 격려하여 주옵소서.”
의무실은 네 벽이 철판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찜통 그 자체였다. 바깥쪽 연통에서 뿜어대는 열기는 사막보다 뜨거웠다. 팬티 바람으로 있어도 기포와 수포가 생길 정도였다. 그는 이곳에서 후배 김은경이 챙겨준 마른 멸치와 잣, 마른 새우만 먹으며 버티느라 뼈만 남은 몰골이 되어 갔다.
드디어, 35일간의 항해를 마친 배가 목적지인 벨링햄 항구에 도착했다. 간단한 세관 검사를 끝낸 배는 화물선 전용 부두인 펌데일 부두에 정박했다. 그날 밤 10시, 사내는 워싱턴 D.C. 북미한국인권문제협회 사무국장 패리스 하비(Pharis Harvey) 목사와 시애틀의 김동건 장로 부부에게 인계되어 미국 땅에 발을 디뎠다.
그 사내는 바로 5.18민주화운동의 주모자로 수배되어 쫓기던 중 미국으로 밀항한 윤한봉이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인 강신석 목사와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던 조아라 장로가 밀항과 해외 망명을 지원하고 있었다. 하비 목사는 미국 민주당의 중진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윤한봉의 정치망명 절차를 밟아 달라고 요청했다. 윤한봉은 당분간 동양식품점을 운영하는 김동건 장로 부부의 보호를 받으며 점원 생활을 했다.
1981년 11월 하순,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간 윤한봉은 미국 내 한국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던 김상돈의 환대 속에 해외민주화운동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그는 맨 먼저 홍기완, 김동근, 이길주, 이인수 등과 더불어 광주수난자돕기회를 만들어 광주항쟁 부상자와 유가족을 돕기 위한 모금 활동에 주력했다. 일정한 모금액이 걷히면 곧장 광주의 조아라 장로 앞으로 부쳤다. 이 단체가 1988년 6월에 해산할 때까지 송금한 돈은 6년 동안 무려 3만여 달러에 달했다.
이어, 윤한봉은 미국의 주요 지역에 청년운동단체를 만든 다음 이 단체를 전국적인 연합 조직으로 결성해 나갔다. 해외운동의 거점인 민족학교를 설립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펼쳐 나가기 위해 윤한봉은 마산 부두에서 김은경을 비롯한 동지들로부터 받은 3천 달러를 사무실 운영비로 내놓고 미국 내 동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민족학교는 재미동포 1, 2세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국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미국 사회에서 긍지를 지니며 살아가게 하고 조국과 민족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곳입니다.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급하고 동포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려고 하오니 도와주십시오.”
이듬해인 1983년 2월 5일, 민족학교 설립식이 열렸다. 치과의사 최진환을 이사장으로 내세우고 전진호는 교장에 앉힌 뒤 윤한봉은 학교의 청소와 심부름꾼 노릇을 하겠다며 소사(小使)를 자청했다.
5월 하순, 로스앤젤레스 프레스클럽에서 특별 강연회가 열렸다. 이날 수백 명의 한인 동포들 앞에서 연설을 한 윤한봉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고 말았다.
“저는 5.18 광주민중항쟁의 수배자로서 2년 전 마산 앞바다에서 화물선을 타고 밀항한 윤한봉입니다. 동포 여러분!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는 것이 지금 깨어 있는 시민들이 할 일입니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주십시오.”
두 시간 반 동안 진행된 이날의 강연회는 대성공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민족학교는 로스앤젤레스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84년 1월 1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노동조합 건물에서 결성된 ‘재미한국청년연합'을 필두로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 ‘해외한국청년연합’이 속속 결성되었다. 주름진 얼굴, 순박한 미소, 허름한 옷차림의 그는 영락없는 농부처럼 보였으나, 가슴속에 들어찬 뜨거운 열정만큼은 남달랐다. 미국 내에 민족학교와 한청련 지부를 만들어나가는 동안 그는 탁월한 조직가요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윤한봉은 이들 연합조직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견인했고 반전반핵 세계평화운동과 제3세계 연대운동을 일구어 나갔다.
조국의 민주화에 몸을 바친 합수(合水)
윤한봉은 1948년 2월 1일 전남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어나, 광주일고를 거쳐 1971년 늦은 나이에 전남대학교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그해 12월 30일 교련반대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에게 끝없는 고난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이제 공부는 끝이다. 나는 앞으로 목숨 걸고 저놈들과 싸우겠다!”라고 선언한 그는 전남대 학생 동아리인 민족사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후배 정상용 등과 더불어 사회과학 공부와 학생운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1974년 4월 들어 윤한봉은 민청학련사건으로 유신헌법반대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죄, 내란예비음모죄,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죄 등으로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전남대에서 제적되었다.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그는 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를 결성해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종교계 및 재야인사들과 연대하여 청년운동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1980년 1월, 민주청년협의회 전남 책임자로 활동하던 윤한봉은 5월 15일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무등산 모임에서 후배들과 더불어 도청을 장악하여 투쟁할 것을 역설했다.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짓밟을 때 윤한봉도 시위대에 가담해 싸웠지만 후배들은 “형님! 어서 광주를 빠져 나가세요.”라고 강하게 권고했다. 계엄군에 의해 도청이 장악된 5월 27일, 윤한봉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 인물로서 내란음모죄로 전국에 현상 수배되었다. 경찰과 정보 당국은 “윤한봉은 김대중에게서 돈을 받아 광주 폭동을 주도한 반란 수괴이다.”라는 논리로 큰 그림을 그려 놓고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광주의 항쟁 지도부는 천신만고 끝에 윤한봉을 미국행 화물선에 태워 밀항시키는 데 성공했다. 윤한봉 검거에 실패한 정보 당국은 ‘수괴’를 정동년으로 바꿔치기했다.
이후, 윤한봉은 미국에서 해외 민주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반체제 인사로 널리 알려졌으나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수배가 풀렸다. 1993년 5월 19일 오전, 마흔여섯 살 중년이 된 윤한봉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맨 먼저 망월동 묘역을 찾은 그는 후배 윤상원과 박관현의 묘지 앞에 꿇어 엎드려 “함께 도청을 사수하지 못해 미안하다. 혼자만 살아 돌아와서 정말 부끄럽구나.”라며 오열했다.
윤한봉은 당시 광주에 난립한 10여 개의 광주항쟁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온 정열을 바쳤다. 운동권 원로들과 항쟁 당시의 부상자들을 만나 협조를 구하던 윤한봉의 노력은 1년여 만에 결실을 보았다. 1994년 8월 30일, 마침내 5.18기념재단이 창립되고 조비오 신부가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전라도 말로 똥거름을 뜻하는 합수(合水)를 자처한 그는 이미 공언한 대로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았다.
타고난 일벌레요 조직가였던 그는 1995년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했고, 5.18 특별법 제정과 학살자 처벌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996년 5월에는 민족시인 김남주 기념사업회를 추진했고, 2000년 7월에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투쟁을 주도했으며, 2004년 6월 5.18기념재단 주최 ‘5.18아카데미’ 교장에 취임하는 등 병마와 싸우면서도 투혼을 불살랐다.
2007년 6월, 그는 폐 이식수술 직후 급성 면역거부반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평생을 독재 체제와 투쟁하며 수배와 투옥 등 형극의 길을 걸어왔던 사람,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로 불린 그에게는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