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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추협_ 1987년 직선제개헌쟁취의 불씨를 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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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계와 상도동계를 이어준 김영삼의 단식투쟁

박정희의 암살 이후 12.12군사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의 등장은 새로운 비극의 서막을 예고했다. 빛고을 남도를 핏빛으로 물들인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 하야시켰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 뒤 민주화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야당 정치인 김대중은 구속되었고,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가택연금 상태였다.

1981년 5월 1일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김영삼은 6월 9일 측근들과 함께 삼각산 등반을 시작으로 민주산악회를 만들었다. 고문 김영삼, 회장 이민우, 부회장 김동영과 최형우로 정한 뒤 이들은 매주 목요일마다 등반을 했다. 명목상 산악회 모임일 뿐 실질적으로는 정치단체인 민주산악회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산악회원들에 대한 정보 당국의 가중되는 탄압 속에 1982년 5월 말 김영삼은 2차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또다시 발이 묶인 김영삼은 허공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비장한 결단이 필요해.’

5.18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이한 1983년 5월 18일, 김영삼은 상도동 자택에 모인 민주산악회 동지들 앞에서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읽어나갔다. 

“나의 이번 단식은 5.17군사쿠데타에 의해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파괴, 부정당함은 물론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백 수천 명의 민주 시민이 광주에서 무참히 살상당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 데 대한 자책과 참회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며, 비극적인 광주사태로 목숨을 잃은 영혼과 거기서 살상된 민주 시민들과 그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에 동참하는 기회이며, 동시에 반민주적인 독재권력의 강화와 인권유린 및 정치적인 탄압에 대한 항의와 규탄의 표시이자 민주 정치의 확립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나마 시급히 강구되어야 한다는 나의 정치적 요구의 표시입니다. 또한 나의 단식은 앞으로 우리가 전개해야 할 민주화투쟁은 생명을 건 투쟁이어야 하며 생명을 건 투쟁만이 민주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 여러분께 알리면서 나의 투쟁 결의를 굳건히 다지기 위한 것입니다.”

김영삼은 이보다 16일 앞선 5월 2일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여 구속인사 석방과 복권, 정치활동 규제 해제, 해직 교수와 근로자 및 제적 학생들의 복직 및 복학, 언론통폐합 조치의 백지화와 언론의 자유 보장,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개헌과 반민주 악법 철폐 등 5개항을 요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이 이 요구 사항을 묵살하자 단식이라는 극한의 투쟁 방식을 선택했다.

이즈음 함석헌과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김영삼의 단식에 동조하여 민주화를 위한 성명서를 냈고, 김수환 추기경도 상도동 자택을 방문하여 단식 중인 김영삼을 위로해 주었다.

단식 8일째인 5월 25일, 김영삼의 건강이 악화되자 노량진경찰서장은 그를 구급차에 태워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긴 뒤 치료를 받게 했다.

“총재님, 링거를 맞고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 납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김영삼은 고개를 흔들었다.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소. 나를 내버려 두시오.”

김영삼은 병원에서도 단식을 이어 갔다. 이때, 전·현직을 국회의원 33명을 포함한 58명이 코리아나호텔에 모여 민주화를 위한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지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김영삼 총재님이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도 이 시국을 타개할 방도를 마련해야겠소.”

누군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사실, 이 자리에 모인 정치인들은 전두환 군부독재와 싸울 모종의 정치 결집체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날, 58명의 야당 정치인들은 ‘범국민 연합전선’을 추진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조윤형, 박영록, 김정두, 이기택, 황낙주, 박용만, 최형우, 김상현, 김녹영, 김정우, 이중재, 김덕룡, 홍영기 등이 13명이 소인회를 꾸려 김영삼 단식농성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여기에다 101명의 서명을 받은 다음 민주화추진범국민단체를 구성했다. 오랫동안 갈등 관계에 있던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연합전선을 구축해 만든 이 모임은 훗날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목숨을 건 김대중의 귀국과 신당 돌풍

김영삼이 국내에서 단식투쟁을 벌일 무렵, 김대중은 미국에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밤, 무장군인들에게 끌려가 육군본부 대법정에서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은 2년 7개월의 옥고 끝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으로 추방된 상태였다.

김영삼의 단식에 관한 소식은 이민우, 김동영, 최형우가 AP통신에 알려줌으로써 해외에 퍼져 나갔고 미국의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및 프랑스 르몽드지 등에서 속속 기사화되었다.

미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 김대중은 뉴욕 타임스에 〈김영삼의 단식투쟁〉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하버드 대학교의 제롬 코헨 교수가 말했다.

“당신은 김영삼 씨와 오랜 경쟁자가 아니오? 그런데도 그를 위해 애쓰다니, 정말 

감동적이오. 내가 당신의 글을 손질해 주겠소.”

김대중은 플래카드를 들고 워싱턴과 뉴욕 등지에서 김영삼 단식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고, 미국에 거주하는 재야인사 70여 명과 함께 듀퐁 서클 광장에서 전두환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여 나갔다. 또한 미국의 여러 대학과 인권단체, 외교협회뿐만 아니라 교회에 나가서도 연설했다.

5월 18일부터 6월 9일까지 무려 23일 동안 곡기를 끊은 김영삼은 위중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싸우다 죽기를 위하여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긴 뒤 단식을 중단했다.

김영삼의 단식은 침체기에 빠진 한국의 민주화를 견인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숙명의 라이벌 관계에 있던 김대중과 화합함으로써 야권은 물론이고 재야와 학생, 시민들 모두에게 큰 힘을 불러일으켰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은 1983년 8월 15일 8.15 공동성명을 통해 “5.18광주항쟁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국민께 사죄드립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반독재투쟁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으며, 이후 두 사람은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계파를 초월한 범국민적인 정치단체를 결성할 것을 약속했다. 

1984년 5월 18일,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가 힘을 합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다. 이로써, 수년간 소원했던 야권의 양대 진영이 다시 손을 잡고 반독재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즈음 민추협 내부에서 1985년의 2.12 국회의원 선거 참여를 두고 논의를 한 끝에 참여 쪽으로 가닥이 잡혔고, 신당을 창당해 총선에 참여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1984년 12월 20일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발기인대회가 열렸다.

1985년 2월 8일, 김대중은 총선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두환 정권은 “귀국하면 신변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라고 협박했지만, 목숨을 걸고 귀국을 강행한 것이다. 김대중의 귀국은 선거 판도를 바꿀 만큼 거센 돌풍을 일으켰다. 생존 가능성 제로에 가까웠던 신민당은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총 148석을 얻어 여당이 된 민정당(지역구 87석, 전국구 61석)에 이어 총 67석(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떠올랐다.

엄혹했던 5공 정권에 균열을 낸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김대중의 공조로 이어졌고,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연대하여 민추협을 결성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민추협이 표방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요구는 신당 창당으로 이어졌으며, 1985년 2.12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신민당을 통해 전 국민적인 의제로 확산되었다. 일관되게 추진된 이 어젠다는 1987년 6.10민주항쟁의 용광로를 거친 뒤 ‘4.13호헌조치’의 벽을 깨부수고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직선제개헌의 쟁취이라는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