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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도 떨어뜨린다_ 공포정치의 산실 중앙정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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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기업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곳으로 끌려갔어요. 두 남자와 나란히 말이오. 문이 열리자 두 남자는 사라지고 그 대신 넓은 방 저 안쪽에 어떤 웃통을 벗은 사내가 마치 스님들이 쓰시는 주장자 같은 몽둥이를 들고 의자에 앉아서 내가 들어서자마자 바닥을 내리치며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어요. 
“네가 남정현이냐!” 하고 말이오.
나는 그 순간 이게 무슨 꿈이지 하고 생각했어요. 정신이 아득해졌지 뭐요. 그러자 다음 순간 그 목소리가 다시 바닥을 몽둥이로 내리치며 말하는 것이었어요. 
“벗어라!” 하고 말이오. 
나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어요. 허허허.


소설가 남정현이 그날 끌려갔던 곳은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이었다.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살아서 들어갔다가 죽거나 병신이 되어 나오는 바로 그곳이기도 했다.

그가 끌려간 것은 얼마 전 1965년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했던 단편소설 「분지(糞地)」 때문이었다. 홍길동의 10대손인 홍만수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한반도에서의 반전과 반핵을 주제로 한, 일종의 정치 우화 소설이자 풍자소설이었다. 양공주와 미군이 등장하고, 군수품 밀매업자도 나오지만 어디까지나 문학 작품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하여 막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분지」가 반미용공을 내세워 국가를 위태롭게 할 목적이었다고 몰아갔다. 더구나 「분지」가 몇 달 후 북한의 《통일전선》에 재수록되자 간첩 혐의까지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서울 남산.

박정희 군사정권 내내 그리고 그 후 전두환 정권 때까지 무려 23년 동안 대한민국을 공포정치로 몰아넣고 무소불위의 채찍을 휘두르던 곳.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나이와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폭력을 휘둘렀던 무법 지대. 정부 각 부처는 물론이고 대학가, 노동 현장, 일선 경찰서에까지 소위 ‘기관원’을 상주시켜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국가권력의 검은 심장부.

중앙정보부는 1961년 5월 20일 5·16군사쿠데타의 주역인 김종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승만 시대에 정치 활동으로 악명 높았던 김창룡의 육군 특무대를 미국식 CIA를 본 따 새로 만든 것이었다. 겉으로는 반공을 내세워 간첩을 잡는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는 민주화의 요구를 억누르고 불안정한 군사정권을 보위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경찰이었던 셈이다. 비민주적인 독재정권에게는 반대 세력에 대한 불법 사찰과 도청, 감시를 위해서 이런 비밀 조직이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렇게 한번 만들어진 비밀 조직은 날이 갈수록 어둠 속에서, 어둠을 먹고 자라며 더욱 강해졌고, 더욱 잔인한 괴물로 변해갔다. ‘남산’이라는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벌벌 떨었고, ‘기관원’이라는 말 한마디에 그 누구도 막을 자가 없었다. 

심지어는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의 핵심 4인방인 길재호, 김성곤, 김진만, 백남억 같은 의원들도 끌려가 뭇매를 맞았고, 쌍용그룹의 창업자 김성곤은 그 유명한 ‘카이저 콧수염’을 모조리 뜯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약과에 불과했다.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 등 남산의 부장들이 차례로 바뀌는 동안 그곳은 본격적인 간첩 만들기 작업실로 변해갔다. 그리고 폭력은 잔인한 고문으로 변해갔다.

1973년 유신정권 치하에서 벌어졌던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40대 초반의 젊고 건강했던 그는 유럽거점간첩단사건에 대해 수사 협조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서 근무하던 자기 동생과 웃으면서 들어갔다가, 3일 만에 중앙정보부 건물 7층 화장실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으로 돌아왔다. 

당시 중정 차장은, “간첩 혐의를 자백하고, 기관원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서 투신하였다.”고 발표했지만 전기고문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당하다가 죽자 7층에서 던져 자살로 조작했음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으로 밝혀졌다.

다음 해인 1974년에는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중정은 유신체제를 부정하는 학생들의 조직인 이른바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재건위사건’을 만들어 냈다. 도예종, 이수병, 여정남 등의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 전복을 위해서 대학생을 조직하고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거짓이었다.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자비한 폭력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중앙정보부의 슬로건은 차라리 ‘없는 간첩도 만들어 내어라!’가 더 맞았을지 모른다. 잠 안 재우기, 인간성을 부정하는 쌍욕, 발길질, 주먹질, 몽둥이질, 무릎에 각목을 끼우고 짓밟기는 예사였고, 나중에는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고문과 전기고문까지 서슴지 않았다.

합법적 수사기관인 경찰과 검찰이 있었지만 중정은 그 모든 것 위에 있었다. 결국 이들을 포함해 8명은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바로 그다음 날인 1975년 4월 9일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에 대하여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는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공안사건이라고 결론지었고,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8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에 앞서 1967년, 유럽에서 유학 중인 음악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 예술가와 교수 194명이 동베를린을 넘나들며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강제로 한국으로 끌고 와 이른바 ‘동백림사건’을 만들었다. 1973년에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하여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 했던, 이른바 ‘김대중납치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들 뒤에는 언제나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귀천」으로 알려진 인사동의 괴짜 시인 천상병도 그중의 하나였다. 

서울대 상대를 중퇴한 순진무구하고 가난했던 시인은 평소에 누구나 붙잡고 술값으로 ‘딱 500원만!’이라는 말로 유명했는데, 친구인 강빈구가 ‘동백림사건’으로 끌려 들어가자, 어느 날 그도 남산으로 잡혀갔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던 것은 불고지죄, 반공법, 공갈죄 등 어마어마한 죄명이었다. 

‘천상병은 간첩인 친구 강빈구에게 공포감을 조성해 막걸리값으로 500원, 1,000원씩 받아 쓰면서도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

그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의 치명적(?)인 혐의였다. 

그리고 온갖 고문이 가해졌다. 그렇게 반년 후 선고유예로 풀려났을 때, 그는 몸도 마음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명동 다방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여기가 뉴욕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라는 그 악명 높았던 중앙정보부는 독재자 박정희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쏜, 마지막 부장 김재규와 함께 막을 내렸다. 잠시 신군부의 출현과 함께 무소불위의 검은 권력인 '국군보안사'라는 이름으로 군인들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권력자 전두환이 그 자리를 차지한 이후, 국가안전기획부라는 이름으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한 어둠속의 권력기관으로 존재하였다.

그때, 작품 「분지」로 필화사건을 당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소설가 남정현은 그 후 7년 구형을 받았지만 재판과정에서 선고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