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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역사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역사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스스로 역사가 된 노무현 전 대통령.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그에 대한 호불호를 불문하고 이제 우리는 그를 역사로 만날 수밖에 없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민주화운동가 노무현을 복원하기 위해 사료를 뒤져보았으나, 소장된 사료는 많지 않았다. 사료관의 민주화운동 관련 80여 만 건 사료 중 그에 관한 것은 겨우 100여 건에 불과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재진행형의 역사였던 그의 족적을 사료로 수집한다는 것은 강박관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노무현은 1981년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부산의 학림사건이라고도 하는 부림사건은 <전환시대의 논리>와 같은 금서(禁書)를 읽으며 의식화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정부 전복집단’으로 매도된 22명의 피의자들이 영장없이 연행돼 최고 57일간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던 1980년대의 전형적인 시국사건이었다. 당시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정권의 안보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였고, 노무현․ 김광일․ 문재인 변호사 등이 무료 변론에 나섰다. 5공화국의 대표적 용공조작사건 중 하나가 된 이 사건을 통해 아마도 그는 국가보안법이란 괴물이 어떤 것인지 그때 사무치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 발생 몇 달 후인 1982년 3월에 같은 지역에서 발생했던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변론요지인 ‘처벌한다면 사랑의 매가 필요할 뿐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신문스크랩을 찾았다. 그는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등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문부식․ 김은숙 등의 변론을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3년 후인 1985년 5월 3일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 결성에 참여하고 1986년경부터는 변호사업을 중단하다시피하며  민주화운동에 전념했다. 1987년 6월항쟁의 흐름속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자 부산 국본의 상임위원장을 맡아 부산 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이 되어 거리에 나왔다. 이즈음의 그는 인권변호사를 넘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뛰는 운동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노동자대투쟁이 한창이던 1987년 8월, 노무현은 거제 대우조선 파업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의 사체부검과 임금협상을 거들어 주다 노동법의 대표적 악소조항인 `3자개입' 금지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1988년 4월에는 13대 국회의원 총선과 관련한 문서와 사진사료가 몇 건 존재하는데, 그때를 전후로 정치인 노무현의 길이 시작된다. 그가 당선 직후 인천지역해고자협회 등에 보낸 서한을 보면, “‘타도 허삼수!’,‘사람 사는 세상에 돌아와!’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총선에 나와 승리했다”며 “앞으로도 현 지위에 연연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면서 ’사람 사는 세상이 오는 날까지‘ 진보하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밝혔다. 

박용수 선생이 기증한 사진사료를 보면 고려대에서 열린 노점상대토론회에서 연설을 하고(1988.8.1), ‘군사문화 종식과 백색테러 추방을 위한 시민공개토론회’에서 대안을 제시하는(1988.9.9) 그를 만날 수 있으며, 경향신문사 제공 사진사료는 제5공화국 비리와 정경유착의 실상을 파헤치기 위한 일해재단 청문회에서 질의를 하고 있는 ‘청문회스타’의 모습(1988.11.8)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등포지구 노동법개정특별위원회가 주최한 노무현 의원 초청강연회에서 강연한 내용인 ‘5공비리와 노동자’(1988.11.8), 충남택시노동조합협의회 등에서 주최한 노동자 웅변대회와 노무현 의원 초청강연회(1988.12.4), 그리고 노무현 의원의 현대중공업 연설(1988.12.26)을 담은 테이프 녹취는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여전히 사회에서 소외받는 노동자, 도시빈민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준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결의가 충만한 시기였다. 실제로 당시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이란 정간물을 만들어 이들과 소통하고자 했다. 1989년에도 그의 노동현장에 대한 관심은 여전해서 현대그룹 소속 노동자 고 이오희씨 흉부 X-선상의 진폐 구분 판독에 대한 협조요청(1989.8.23)을 하고, 이해찬 의원과 함께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대한 공권력의 직장폐쇄와 노조간부구속 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서(1989.12.13)를 작성한다. 1990년 1월 3당통합에 반대한 노무현은 ‘정계개편의 성격과 민주진영의 과제’라는 글을 발표한다. 그 전문도 소장되어 있다. 당시의 사진사료는 노동운동탄압분쇄결의 및 서울지역임금인상투쟁본부 발대식에서 구호를 외치고, 김영삼 총재의 3당합당의 부당성에 대해 설명하며, 방송관계법 개악 저지대회에 참가한 그의 모습이 담겨있다. 노무현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보낸 경축전보는 전교조에 대한 그의 희망이 실려있다. 문민정부 이후의 사료소개는 생략한다. 이 정도만으로도 민주화운동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살피는 데는 크게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