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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공동선언

2000년 6월 13일 오전 9시,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태운 공군 1호기가 성남 서울비행장을 출발했다. 공군 1호기는 9시 45분에 북위 38도선을 넘어 북한 영공으로 진입했다. 백령도가 오른편 옆구리 쪽으로 내려다보였고, 그 위쪽으로 북한 장산곶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북한 땅이 엷은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오전 10시 27분, 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을 선회하며 활주로 위에 사뿐히 착륙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는 참으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때, 일행 가운데 누군가가 외쳤다.

“김정일 위원장이 보인다!”

비행기 창문 밖에는, 선글라스를 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갈색 인민복 차림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대중 대통령의 표정은 고요했다. 초청국의 국가 원수가 공항에 나와 영접을 하지 않는 것은 통상적인 외교 관례였다. 김 위원장은 이 같은 외교 관례를 깨고 김대중 대통령을 마중 나온 것이다. 공군 1호기에서 내린 김 대통령이 마중 나온 김 위원장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힘들고 두려운, 무서운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김 위원장이 걸어오며 인사를 건넸다. 남북한 7천만 겨레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두 정상이 두 손을 굳게 맞잡았다. 역사적인 악수였다. 두 정상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 했다.

베일 속에 가려진 김정일 위원장은 연장자인 김 대통령에 대한 배려도 자상했다. 그동안 알려져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활달한 모습이었다. 이 모습이 남쪽 텔레비전 화면에 여과 없이 방영되었다. 남한 주민들에게 풍부한 표현으로 거침없이 말하는 북한 지도자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의장대 사열을 마친 두 정상은 백화원 영빈관에 도착했다. 회담은 다음날로 예정돼 있었다. 6월 14일 오후 3시, 분단 55년 만에 남북한 정상회담이 열렸다. 오후 5시 30분경에 잠깐 쉰 것 말고는 팽팽한 긴장감을 띤 채 마라톤 회의가 계속되었다. 오후 6시 50분이 되어서야 정상회담이 마무리되었다. 남측의 임동원 국정원 원장, 북측의 김용순 비서가 합의 내용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들은 몇 시간 동안 자구 수정을 거듭하느라 애를 썼다.

14일 저녁, 목란관에서 남측 주최로 만찬이 열렸다. 밤 8시경, 두 정상이 등장했다. 두 사람의 표정은 긴 회담을 끝낸 탓인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회담을 진행하며 합의에 이르는 과정은 그만큼 힘겨웠다. 밤 11시 20분경, 임 원장과 김 비서가 수정 완료된 공동선언문을 가져왔다.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공동선언문에 나란히 서명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참석자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마침내 공동선언문에 합의하고 서명했습니다.”

순간, 목란관을 가득 채운 참석자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장내는 기립박수의 열기와 환호로 가득 찼다.

“역사적인 공동선언문 합의를 축하하며 건배합시다!”

사회자가 선창하자,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가볍게 잔을 마주쳤다. 이를 신호로 참석자들 모두가 잔을 높이 들어 축배를 들었다.

6월 15일 아침, 두 정상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공식 발표했다. 이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세상에 나와 빛을 발했다.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 평화와 공존에 바탕을 둔 원칙이 선언문의 문구 속에 박혀 있었다. 남과 북의 시민들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1. 남북 공동선언 전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13일부터 6월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공동선언문에서 가장 고심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1항과 2항의 통일 방안이었다. 그중에서도 2항에 명시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라는 구절이 절묘했다. ‘연합제안’이란 김대중이 1971년 대선을 위해 박정희와 맞대결을 펼쳤을 때부터 일관되게 주장해온 통일 방안이었다. 김대중은 이 통일 방안을 꾸준히 연구하고 다듬어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라는 접점을 찾아낸 것이다.

2. 한반도의 통일방안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남북한 공동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74년 8월 15일에는 〈평화 통일 3단계 기본 원칙〉을 발표했다.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킨 뒤 남북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 같은 통일 방안과 화해 무드를 유신체제 유지를 위한 선전 도구로 이용하고 폐기 처분했다.

1990년대 들어와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대통령도 통일 방안을 내놓은 바 있다. 1993년 7월 6일 발표한 〈3단계 3기조 통일정책〉이 그것이다. 이 통일 방안은 민주적 절차의 존중, 공존공영의 정신, 민족 전체의 복리라는 3가지 사항을 먼저 달성해야 한다는 당위가 깔려 있다. 이 같은 당위적 전제가 선결된 뒤 남북한은 첫째, ‘화해와 협력의 단계’를 거치고, 둘째, 남북연합의 단계를 거치며, 셋째, 마지막으로 ‘1개 국가’라는 3단계 통일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이 방안은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과 마찬가지로 ‘남북연합’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1민족 1체제’의 완전 통일을 지향하는 청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이와는 별개로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1970년대부터 줄곧 〈3단계 통일방안〉을 주장해왔다. 김대중의 통일 방안 제1단계는 ‘공화국연합’ 혹은 국가연합 방식의 통일이다. 남한과 북한 공히 독립국가로서의 권한, 즉 외교, 국방, 내정의 권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양 공화국에서 동수 대표의 파견으로 공화국 연합기구를 창설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두 체제는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과 함께 군사적 신뢰와 군비 축소, 경제 협력을 이루게 된다.

제2단계로는 ‘연방제 방식의 통일이다. 연방제 아래에서 남북한의 외교와 국방은 연방이 완전 장악하고 연방제 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내정도 연방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미국식 연방제와 유사한 방안이다. 제2단계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그간 독립국가 형태로 존재하던 양 공화국이 해소되고 지역자치정부로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또한, 연방정부 아래에서는 연방 대통령을 선출하고 연방 국회를 구성하게 된다. 물론, 유엔도 단일 회원국으로 변하고 각국과의 국교도 단일화하게 된다.

마지막 제3단계로는 ‘완전통일’을 실현한다. 제1단계와 제2단계가 순조롭게 이행되어 제3단계의 과정에 이르면 남북이 단일 정부 체제로 전환하여 1민족 1국가 1정부의 완전 통일국가를 이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30여 년 간 구상하고 다듬어온 통일 방안을 〈6․15 남북 공동 선언문〉 제2항에 녹여 합의에 이른 것이다.

두 정상이 발표한 〈6․15 남북 공동 선언문〉은 각본 없이 만나 극적으로 일구어낸 뜻밖의 풍작이었다. 장장 3시간 50분간의 긴 회담 끝에 합의에 도달한 문서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을 미래의 청사진이 들어 있었다.

3. 남북 공동선언 이후 의의, 그리고 달라진 것들

6․15 공동선언 이후 모든 것들이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해 8월과 11월, 12월에 각각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남과 북에 부모와 형제를 둔 혈육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해 9월에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갔다. 짧게는 15년, 길게는 43년까지 복역한 이들의 사연이 심금을 울렸다.

다음으로, 남북 분단으로 끊겼던 경의선 기공식이 열렸다. 기공식 이후,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을 위한 복원 공사가 착수되었다. 남북한 사이에는 장관급 회담이 개최되었고,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의 구성이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가장 놀라운 성과를 발휘한 것은 남북한 간의 경협 사업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과 맞물려, 대북 사업의 전권을 지닌 현대와 북한이 화끈한 합의에 이른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이 결과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특구와 남북관광교류사업의 상징인 금강산특구가 개방되었다. 2000년 8월, 현대와 북한은 서로 합의하여 개성공단 조성사업에 착수했다. 이로써, 개성직할시 일대에 위치한 800만 평 규모의 공단과 1,200만 평 규모의 배후단지가 조성되었다. 이 대단지에 국내 기업을 유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가히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로 변하는 획기적인 구상이었다.

지난 권위주의 정부 시절, ‘통일’이란 단어는 정부 당국자만이 다룰 수 있는 금기의 언어였다. 하지만 2000년 여름에 그 누구의 예상을 뿌리치고 탄생한 ‘6·15남북공동선언’은 남북한을 가로지르는 무지개와 같은 축복의 의미를 지녔다.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한 최고 당국자가 직접 만나 합의하고 서명한 선언문이었기 때문이다.

남북 공동선언이 나온 지도 벌써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안타깝게도 지금 남북한 간에는 평화와 화해 대신 가파른 긴장과 적대감이 쌓이고 있다. 금강산 길은 막혔고, 개성공단에는 불빛이 꺼져 가고 있다. 역사의 격랑 끝에 도달한 빛나는 언덕, 온 겨레가 껴안아야 할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다시 떠올려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