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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맹파업-“노동운동, 정치투쟁의 장을 열다”

1. 새벽의 18인

유월 하순의 꼭두새벽, 텅 빈 도로 위로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 한 대가 달려오더니 구로공단 안으로 사라졌다. 공장지대가 시작되는 가리봉동 5거리 모퉁이에는 빈 택시 한 대가 불을 켠 채 머물러 있을 뿐, 행인이 드물었다. 행인이라면 6시부터 시작되는 일일 3교대의 오전 근무를 위해 나온 노동자들일 것이었다.

“이쪽으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뒷골목에 나직하고도 강한 속삭임이 들린 것은 5시 정각이었다. 공장들의 담벼락 옆에 형성된 상가지대였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젊은이였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골목 여기저기에서 또 다른 젊은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등짐을 졌거나 뭔가 잔뜩 든 큰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다. 모두 18명이었다.

“가자!”

숫자를 확인한 젊은이는 다시 힘차게 속삭이고 앞장섰다. 상가지대 뒷골목을 따라 걷던 젊은이는 큰 도로변에 있는 상업은행 건물이 나타나자 은행 뒤편 골목으로 쑥 들어갔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공간으로, 공장의 담벼락이 막고 있었다. 

공장 안은 어둠에 잠긴 채 고요했다. 재빨리 쓰레기통을 끌어 받침대를 한 젊은이는 무거운 배낭을 진 채 담장을 넘어갔다. 뒤따라 다른 젊은이들도 힘겹게 담을 넘어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조용하던 공장 2층 농성장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다수가 여성인 89명의 노동자들 앞에 방금 진입한 학생들의 대표가 외쳤다.

“대우어패럴 노동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나온 대학생들입니다! 노동자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는 전두환 정권이 구속한 노조간부들을 전원 석방할 때까지 여러분과 함께 목숨 걸고 싸우겠습니다!”

며칠째 잠 못 자고 제대로 먹지 못한 여성노동자들은 지치고 쉰 목소리로 응답했다.

“구속자 석방하고, 노동탄압 중지하라!”

일부 노동자들은 창가에 서서 밖을 향해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이 월담한 곳을 빼고는 공장 담장 전체가 경찰과 회사 관리자, 경비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들은 꼭두새벽의 구호에 놀라 이층을 올려다보았다.

학생들은 들고 온 배낭과 비닐봉지를 풀었다. 빵과 우유, 미숫가루, 소금, 의약품 등 장기농성에 대비한 물품들이었다. 재봉틀이며 재단판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맨 시멘트 바닥에 앉아 농성하기를 6일째, 경찰이 전기와 수도를 끊어 버린 지도 6일째였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세수조차 못한 채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여성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한쪽 구석 깡통에 담아둔 대소변에서 나는 악취가 숨통을 막았다. 그러나 전날 밤 처음으로 회사에서 회유를 위해 제공한 빵을 하나씩 먹었을 뿐, 굶주려 온 노동자들은 악취를 참으며 빵과 우유를 먹기 시작했다.

경찰과 회사 관리자들의 무전기가 바쁘게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1985년 6월 29일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2. 현장으로, 현장으로 !

사건의 먼 발단은 1980년 광주학살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주주의 요구가 총칼로 짓밟히는 것을 목도한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자가 되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지식인에 의한 민주주의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기층민중의 조직적인 투쟁으로 독재를 타도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에는 또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배출한 노동자 출신 노동운동가들도 다수 합류했다. 

그들은 살인적인 폭행과 고문이 일상사인 폭압정권 아래서도 헌신적으로 노동자들을 조직해 나갔고 수년 만에 전국에 몇 개의 민주적이고 투쟁적인 노조를 일궈내는 데 성공한다.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 부흥사, 효성물산, 남성전기, 선일전자, 가리봉전자, 창원의 통일중공업 같은 곳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작은 씨앗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8일 전인 6월 22일, 경찰은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을 전격 구속시켜 버렸다. 임금협상이 끝난 지도 오래여서 아무 문제없이 조용히 지내고 있던 대우어패럴 노조는 물론, 평소 긴밀하게 유대하고 있던 민주노조들은 비상이 걸렸다.

다음날, 청계천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열린 대책회의에 참석한 구로공단의 민주노조 위원장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대우어패럴 위원장의 구속은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소문으로 떠돌던 전면적인 탄압의 서곡입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나머지 민주노조들도 하나씩 각개격파되고 말겁니다.”

“전면적 탄압이라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봐요. 그렇다면 우리도 한꺼번에 잡아가지 않았겠어요?”

“아닙니다. 지금 바로 적극 대응해 동맹파업에 돌입하지 않으면 사회문제화 시키지도 못한 채 흐지부지 파괴되고 말겁니다. 그렇게 되면 각 회사 조합원들은 패배감만 안게 되어 조직을 복구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오래도록 계속된 토론은 즉각적인 공동투쟁으로 집약되었다. 여기에는 청계피복, 원풍, 콘트롤데이타 등 70년대의 몇 안 되는 민주노조들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개별적으로 해산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이번 투쟁으로 승리할 수 없더라도 미래를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합시다! 동맹파업을 결의합니다!”

다음날인 6월 24일 아침, 서울의 9개 공장 2,500명이 일제히 파업농성에 돌입했고 멀리 창원의 통일중공업 노조도 지원투쟁에 나섰다. 구속자 석방 외에도 노동법 개정, 집시법과 언론기준법 폐지, 노동부 장관 퇴진 등 정치구호도 내세웠다. 민주화 이후에는 단위 사업장 투쟁에서조차 정권퇴진 요구가 마음대로 나오지만,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 정치구호를 내세운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3. 구사대 폭력의 원조

대학생 18명이 합류하면서 대우어패럴 농성에 대한 강제해산은 급물살을 탔다. 진압은 경찰에 앞서 회사 측에 의해 시작되었다.

날이 밝으면서 회사 관리자들과 경비들, 돈을 주고 산 용역들이 출근을 시작했다. 경찰은 회사 주변을 완전히 봉쇄하고 그들만 안으로 들여보내 무력진압을 엄호했다.

아침 아홉 시경, 마침내 공격이 시작되었다.

‘쨍그랑!’

자칭 구사대라 불리는 회사 사람들은 일제히 돌을 던져 2층의 유리창을 깨면서 공격 신호를 올렸다. 여성노동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쪽으로 몰리자 농성장과 붙은 벽을 뚫기 위한 해머드릴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구사대는 물러가라! 아니면 뛰어내리겠다!”

남자조합원들과 학생들이 고함을 쳤으나 계속 돌이 날아와 창가에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허름한 블록 벽에 여기저기 균열이 일어났고 벌어진 틈새로 희뿌연 시멘트 가루가 뿜어져 들어왔다. 농성장은 삽시간에 괴상한 냄새와 분진에 휩싸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구멍은 금방 커져 사람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못 들어오게 막아!”

남자 조합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구사대를 막으려 했으나 구사대는 소화기를 쏘아대며 밀고 들어왔다. 2백 명이 넘는 숫자였다.

구사대의 폭력은 무자비했다. 닥치는 대로 물건을 잡아 노동자들에게 던지며 달려든 그들은 여성노동자들이 겁에 질려 바닥에 쪼그리자 재단판 위에 올라가 펄쩍 뛰어내려 짓밟아댔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여공들의 머리를 지근지근 밟고 등짝에 발길질을 해대고는 하나씩 머리칼을 휘어잡아 질질 끌고 나갔다.

특히 남자 조합원과 학생들은 구사대의 집중타격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무더기로 달려들어 쇠파이프와 구둣발을 날려 처참한 몰골로 만들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얼굴과 머리가 터져 피투성이가 되고 이가 부러진 채 포로처럼 질질 끌려 나갔다. 팔뼈가 부러지거나 허리를 다친 사람도 있고 심장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된 노동자가 가슴팍을 너무 맞아 의식불명에 빠지기도 했다.

한 시간여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학생을 포함한 110여 명은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끌려 나갔다. 이 중 학생과 노조간부들은 경찰에 넘겨져 구속되고, 나머지 여성노동자들은 또 다시 매를 맞으며 강제로 사표를 쓰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대우어패럴뿐 아니라 부흥사 등 동맹파업에 참가한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경찰에게 당하거나 아니면 경찰의 엄호를 받는 구사대의 무차별 폭력 아래 처참하게 강제 해산되었다.

구로동맹파업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36명이 구속되고 56명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27명은 즉심에 회부되었다. 이들에게 적용된 법령은 노동법 위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십여 개가 넘었다. 동맹파업에 참가한 9개 사업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는 2천여 명에 이르렀다. 

구로동맹파업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해방직후 수차례 벌어졌던 총파업 이후 처음 일어난 동맹파업이자 정치적 구호를 내세운 정치파업으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