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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매일신문> 사설 필화사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후 정전협정의 준수 여부를 감독, 조사하기 위해 유엔 결의에 따라 한국에 파견된 <한국휴전중립국감시위원단>은 스웨덴, 스위스와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등 4개 중립국으로 구성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등 공산국가가 참여한 것에 반대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을 동원해 연일 <체코·폴란드 물러가라>는 관제데모를 벌였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학업에 막대한 지장을 겪고 있던 터에, 1955년 9월 10일 유엔대표부 상임대사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하자 중고등학생을 동원, 폭염속에 서너 시간이나 세워놓음으로써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에 <대구매일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최석채는 9월 13일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했다. 9월 14일 국민회 경상북도 본부 총무차장 김민, 자유당 경상북도당부 감찰부장 홍영섭 등 20여 명의 청년이 대구매일신문사를 습격, 사원들에게 중경상을 입히고 인쇄시설을 파괴한 후 달아났다.

대구매일신문사에서는 사전에 습격 정보를 입수하고 남대구서에 경호를 부탁했으나 경찰은 형사 2명을 파견했을 뿐 별다른 대비를 해주지 않았다. 사건발생 3일 후 경상북도 사찰과장은 테러범들은 검거하지 않은 채 최석채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대구매일신문은 정부나 테러단의 협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더 강력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다음 날 신문은 인쇄시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가톨릭출판사에서 임시 판형인 타블로이드판으로 찍어내면서도, 테러의 주체는 자유당과 국민회 간부라고 못 박고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도와 함께 문제된 13일자의 사설을 그대로 다시 수록하여, 이 사설이 어째서 이적행위인가를 독자들에게 물었다.

구속된 최석채는 테러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만인 10월 14일 불구속 기소로 석방되었다가 국가보안법 제4조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56년 5월 8일 대법원장 김병로를 비롯한 대법관 전원 합의로 무죄 판결을 받아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해방 후 필화 사건으로 대법원까지 올라간 최초의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