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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이세종, 전주의 5.18희생자
1980년 5.18민주화운동은 '광주의 비극'을 떠올리지만, 5.18희생자는 전주에도 있었다. 김제 출신의 전북대학교 농학과 2학년 이세종이다. 그는 1980년 당시 전라남북도 대학 연합체인 '호남대학총연합회'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민주화 분위기가 고조되자,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포함 전국으로 확대했고 계엄군들은 주요 대학들로 진입하여 학내를 수색했다.
이세종은 80년 5월 17일 밤 전북대 학생회관 2층에서 동료학생 1백여 명과 함께 '비상계엄 철폐 및 전두환 퇴진' 을 요구하며 밤샘 농성을 벌이다가 건물에 진입한 7공수 부대원들에 쫓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5월 18일 새벽, 온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되었다. 검찰은 이세종의 사인을 학생회관에서 추락사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주검을 검안했던 전북대병원 이동근 교수는 추락 전 계엄군의 집단 폭행 가능성을 제기했고, 한겨레신문은 1993년 3월 22일, '80년 5.18의문사 전북대생 계엄군 집단구타사 가능성'을 보도하였다.
"당시 이씨의 주검에는 검안서상의 손상 외에도 가슴과 등, 옆구리 등에도 타박상이 있었으며 골절의 양상도 모두 복합골절이었다", "집단 구타 없이 단순 추락만으로는 그런 상처가 생길 수 없다"(당시 검안의 전북대병원 이동근 교수)
언론의 보도와 시민들의 진상규명 시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올바르게 평가되지 않았다. 그의 동료들은 1985년 5월 18일에 모교인 전북대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세웠으나 당시 당국의 탄압으로 두달만에 시신이 안치된 생가로 이전해야만 했다.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싶다'는 그의 추모비는 1989년이 되어서야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세종은 1995년 모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학위 수여는 농대 졸업생 전원의 서명을 받은 농대 교수회의와 전체 학장회의의 결정을 총장이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으로 전북대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10월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심의위원회'에서 5.18관련 유공자로 인정받아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계엄 확대조치와 그 일환으로 진행된 각종 체포와 구금이 바로 5.18의 서막이라고 한다면, 이세종의 죽음은 5.18 관련 첫 희생자라고 볼 수도 있다. 순천향대 이민규 교수는 2002년 5.18학술세미나에서 "5.18최초의 무력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5.18 최초의 희생자는 바로 이세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세종은 80년 5.18민주화운동 전북지역 희생자이지만 제대로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다가 사망한지 18년이 지나서야 공식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숨진 학생회관 앞 광장은 '이세종 광장'으로 명명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이후 전북지역 학생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