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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탄생과 시국선언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진대 어찌 강요된 침묵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성직자, 교수, 학생, 문인, 근로자 및 그 밖의 애국인사들과 시민들은 마침내 침묵을 깨뜨리고 민주헌정의 회복과 사회정의를 절규하는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제1 시국선언> 중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은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태동하였다. 1974년 7월 6일 유럽순방을 마친 지학순 주교의 공항 납치와 중앙정보부 조사, 감금, 7월 23일 양심선언 발표 후 전격 구속된 사건은 천주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는 기도회를 거듭하면서 교회 내에는 새로운 각성이 일기 시작했다. 1974년 8월 12일 지학순 주교가 15년 선고를 받은 이후, 기도회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전국 사제 합동 기도회와 사제들 최초의 공개 <성명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적극 지지한다."

8월 26일 인천 답동성당에서 전국 신부 100여 명과 수도자와 평신도 1,200여 명이 모인 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사제 합동기도회’가 열렸다. 이날 그간 논의를 계속해오던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한 최초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기도회에 참석한 전국 사제 130여 명이 서명한 이 성명서는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적극 지지하면서 ①삼권분립과 1인 장기집권 반대 ②긴급조치 2호(비상군법회의)의 해체와 구속자 석방 ③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인간존엄성과 기본권이 보장될 때까지 기도회를 계속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성명서는 아직 사제단의 결성이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성직자 일동>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9월 26일 사제단이 공식 출범할 때까지 기도회 때마다 낭독되었다. 

각 교구마다 돌아가며 개최된 기도회에는 기도회의 참여조차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억압적 상황 속에서 전국의 사제들이 교구를 초월하여 참여하였으며, 항상 몇백 명의 수도자가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함께 하였고 많은 평신도들이 성당 안과 마당을 가득 채웠다. 기도회는 긴급조치라는 살인적 탄압과 통제 속에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불법성을 알리고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알리는 유일한 언로였고 교육장이었으며,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다지는 신앙 결단의 장소였다. 또한 그 곳은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사제들이 한 뜻으로 만나고 의견을 교환하며 결집하는 장소가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발족과 <제1 시국선언>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민주헌정을 회복하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은 9월 23일 원주에서 개최된 성직자 세미나에서 준비되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제 300여 명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명칭에 합의하고 집중적으로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제단에 대한 전국 사제들의 호응과 참여는 실로 엄청났다. 1974년 현재 사제 수가 639명이었고, 외국인 사제가 285명인 상황에서 9월 23일의 사제단 결성에 300여 명이 참여하여 동의하였다. 이는 외국에 나가 있거나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제가 참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74년 9월 26일, 한국 천주교의 큰 축일인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이기도 한 이날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자신의 발족과 활동을 공식화하였다. 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순교찬미 기도회>를 열고 수도자 200여 명, 평신도 1,000여 명과 함께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이름으로 공식적인 첫 성명서인 <제1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사제단의 사회현실에 대한 투신의 의지는 이 날 발표한 <제1 시국선언>에서 잘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발표하고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해 오던 상황에서 유신헌법의 철폐와 긴급조치 철회를 주장했던 것이다. 사제단은 시국선언문에서 ‘1972년 10월 17일을 기하여 이 땅의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촌보도 양보할 수 없는 국민의 기본 인권과 존엄성을 짓밟고’ 있는 유신헌법, 노동자와 농민의 수탈과 희생을 강요하는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 긴급조치 하의 납득할 수 없는 인권유린 상황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다. 이에 따라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와 <제2 시국선언>
"민청학련사건을 심리하는 비상군법회의를 왜 국민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는가?"

같은 해 11월 6일 오후 4시 사제단은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명동성당에서 개최하였다. 기동경찰 200여 명의 성당 출입 봉쇄에도 불구하고 기도회에는 미리 들어와 있던 성직자와 수도자 200여 명, 평신도 1,5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기도회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제2 시국선언>이 발표되었다. <제2 시국선언>은 민청학련 사건의 비공개 재판을 비판하고, 포드 미대통령의 방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또한 “정치 권력의 비대와 남용을 통제하고 이를 방지하려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여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 집권자와 국민의 상호 의무와 권리를 다시 한 번 각성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확신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사제단의 민중 지향성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유신찬반 투표 거부,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와 <제3 시국선언>
"국민투표라는 각본의 예정된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현 집권층의 보다 차원높은 비인간화와 국민에 대한 비인간적 폭력의 정당화이다."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각계로 확산되었고 국제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궁지에 몰린 박정권은 1975년 1월 22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하여 유신헌법의 찬반 여부와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박정권은 2월 5일 국민투표일을 12일로 확정하여 발표하였고, 서울시경에서는 이날 정치성을 띤 모든 종교활동을 금지한다고 발표하였다. 경찰청은 각 경찰서에 ‘기독교인들의 집회 사전 차단, 주동인물 격리’ 등을 지시했다.

2월 6일 7시 사제단은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명동성당에서 강행하였다. 이날 기도회에는 박정권의 기만적인 국민투표와 종교탄압에 분노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단일 기도회 사상 유래가 없는 4,0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사제단은 ‘인권회복, 인간회복, 민주회복은 체제와 정권의 차원을 넘어선 인간적 양심의 요구’라는 <제3 시국선언>을 채택하고 국민투표 거부, 양심선언운동 지지 등의 결의사항을 발표하였다. 기도회가 끝난 후 참석자 1,000여 명은 가두시위에 들어갔으며, 이 중 500여 명은 을지로, 시청 앞을 거쳐 광화문까지 진출했고, 성당에 남아 있던 200여 명은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경찰의 곤봉과 발길질에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2월 12일 박정권의 협박과 회유 속에 국민투표가 강행되었다. 선심공세와 위협, 대리투표, 무더기 투표 등 엄청난 부정이 자행된 가운데 진행된 투표는 79.84%의 투표율에 73%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2월 15일 박정권은 유신체제에 계속 항거하는 민주 세력과 악화된 국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긴급조치 1.4호 위반자 중 인혁당 관련자와 반공법 위반자를 제외한 전원을 석방한다는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박정권은 내란 등의 혐의로 사형까지 선고했던 이들을 석방함으로써 그 스스로가 이 사건이 조작 사건이었음을 밝힌 것이었다. 이는 민주 세력의 부분적 승리였다. 이 조치로 15일부터 3일간에 걸쳐 지학순 주교를 포함함 149명이 석방되었으며, 이로써 그간 집행유예나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20명을 포함한 169명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박정권은 인혁당 관련자 23명과 반공법 위반 11명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 없이 석방에서 제외시켰다.

세상 밖에서 세상 안으로 들어온 교회, 양심의 보루가 되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탄생과 활동은 교회 안팎으로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다. 기도회장은 그 자체로 박정권의 폭압과 왜곡을 폭로하고 진실을 밝히는 현장이었고, 사제단에게는 진실과 정의를 배우고 성장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사제단은 지학순 주교가 옥중에서 작성한 편지, 교회 평신도 단체의 건의문과 성명서 등을 배포하는 한편 사제단의 성명서 등을 배포하여 민주화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교회의 입장과 각오를 천명하였다. 또한 사제단은 기도회 때마다 민청학련 사건의 진상과 관련자들의 근황을 담은 <행복하여라 박해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라는 유인물을 배포하였고, 기도회장에는 구속자 가족들이 나와 구속자들의 결백과 고문 사실 등을 증언하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박정권의 민청학련 사건 조작과 고문 사실은 낱낱이 폭로되었다. 기도회 때마다 행해진 유인물 발표와 구속자 가족의 증언은 박정권의 발표와 언론통제에 의한 왜곡을 바로 잡고 사건의 실체와 진실을 알림으로써 그후 구속자들을 석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교회를 보는 시각들이 바뀌고 있었다. 교회는 인권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양심의 보루라 불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