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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단, 경찰 사복 체포조의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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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최루탄이

1985년 가을.

어느 대학의 시위 모습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시위주동자가 핸드 마이크를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앞장서고, 그 바로 뒤에 구호가 적힌 펼침막을 든 학생들이 앞에 서고, 그 뒤를 수백 명의 시위 참가자가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가두 진출을 시도하는 모습은 그 이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시위 대열이 교문 앞에 도착하고, 전투경찰 대오의 첫 열이 방패를 치켜들면, 세 번째 열의 SY44 최루탄 발사 총이 하늘로 향하고, 그리고 빠아앙, 빵하는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매캐한 연기가 대열을 삼킬 때까지는.

땅에는 백골단이

하얀 헬멧

하얀 운동화

가벼운 방패

짧은 진압봉으로 무장하고

청바지에 청자켓을 입고

사과탄 가방을 둘러맨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생각되는 건장한 사내들이 최루탄 가스로 아비규환이 된 시위대 중심으로 뛰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열은 무너지고. 시위대는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인근 건물로 피해 뛰었다. 처음 보는 괴한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건물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집기를 밖으로 집어 던지면서 시위대는 경찰의 시위 대응 방식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이른바 방어적 거리 진출 차단에서 공격적 시위 참가자 검거로.

경찰이 대응 방식을 바꾼 이유는?

1985년에 일어난 주요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과 전두환 정권의 대응 방식에서 추정을 할 수 있다.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참패.

5월 23일 5개 대학교 학생 73명이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을 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책임 인정과 사과 요구.

6월 24일 구로지역 노동자. 한국전쟁 이후 첫 정치적 연대 파업 돌입.

7월 전두환 정권,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산하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를 용공이적단체로 규정하고 대대적 검거 돌입.

7, 8월 전두환 정권과 당시 집권당(민주정의당)이 학생운동 관련자를 법원 영장 없이 6개월 이내 선도 교육(불법적으로 강제구금시설에 수용과 강제 사상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한 ‘학원안정법’ 제정 시도.

9월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김근태에 대한 23일간 고문.

1980년대 초반의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 변화

1980년 광주 학살 이후 1983년 12월 유화국면 이전까지

전국 각 대학 캠퍼스에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어, 집회 및 시위를 사전에 원천봉쇄하거나, 시위주동자가 건물 등에 매달려 목숨을 건 시위 주동을 하더라도 불과 몇분 이내에 주동자를 검거하고, 시위 참가자를 검거 또는 해산할 수 있었다. 당시 사복경찰로 투입된 전의경 부대는 통일된 또는 규격화된 복장을 갖추고 있지 않아서, 삼청교육대 교육대상자 또는 정치깡패를 투입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당시 전두환 정권은 경찰의 대학교내 상주 사실을 묻는 국회의원의 국회 질의에 사실무근이라고 대답하였다.

1984년부터 1985년 중반까지

경찰의 대학 교내 철수, 시국관련 구속자의 사면복권과 제적자의 복교 허용으로 상징되는 유화국면 시기에 경찰은 대학 밖으로 철수하여 각 대학의 시위대가 가두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선에서 시위에 대응하였다. 물론 정보기관원의 사찰과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인한 대규모 시험거부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경찰병력이 진입한 사례가 있기도 하였지만, 1983년 이전의 경찰 대응 방식과는 상당히 달랐다. 시위대가 대오를 형성하여 가두 진출을 시도할 때에는 전경 방패부대와 진압봉을 활용한 몸싸움을 통해 시위대 진출을 막기도 하였고, 최루탄과 페퍼포그 차량을 이용해 시위대 본진을 위협하거나, 다연장 최루탄(이른바 지랄탄)을 이용해 시위대 해산에 주력하였다.

백골단은 없다. 그리고 있다.

1985년에 창설되었다고 전해지는 서울시 경찰국 산하 사복체포부대를 흰색 헬멧과 청색자켓 복장 때문에 일반 전투경찰과 달리 백골단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초창기 헬멧은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했으나 1990년대 이후 시위진압용 은회색 헬멧으로 바뀌었다.

이들의 진압방식은 시위 주동자나 참가자 검거 시에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해 시위 참가자 또는 시민들에게 공포를 주는 방식으로 행해졌는데, 이들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각목, 쇠파이프, 화염병을 사용하는 폭력 시위가 불가피하다는 시위대의 주장도 있었다.

이후 전의경 부대 내에 사복체포조 또는 사복제대를 운영하였고, 이들의 폭력적 시위 진압 방식은 결국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의 죽음을 불러왔다.

경찰 공식 직제상 백골단은 없다. 그러나 1980년대 90년대 많은 사람이 외쳤던 “백골단 해체”처럼, 경찰 폭력의 상징인 백골단은 있다.

추신

제1공화국 시대 자유당의 정치깡패 집단을 백골단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