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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통같은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부마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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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하, 큰일 났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1979년 10월 청와대. 

전날 부산 계엄사령부에 도착해 현장을 둘러보고 온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에게 급히 현지 상황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소요사태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부산대를 비롯한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유신철폐를 외치면서...”

 “머야? 계엄령이 떨어졌는데도 소요사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경찰들은 그렇다 치고 계엄군으로 투입된 군인들은 뭣하고 있는 게야? 다들 정신들 똑똑히 차리라구, 정신을!”

박정희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중정부장이 그렇게 어정쩡하니까 애들이 우습게 알고 덤비는 거지.”

 “맞습니다. 각하.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미쳐 날뛰는 놈들에게 몽둥이가 약입니다. 초기에 강력하게 때려잡아야 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경호실장 차지철이 그 틈에 끼어들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 죽어도 까딱없는데, 우리도 데모하는 놈들 100~200만 명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김재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대통령 박정희의 입에서 섬뜩한 말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부산사태 같은 게 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어.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박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려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어?”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중정부장 김재규의 등짝에서 자기도 모르게 진땀이 배어났다. 그들에게 박정희의 영구적 집권을 보장하는 ‘유신(維新)’은 종교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은 곧 죽음을 뜻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미 멈출 수 없게 돌아가고 있었다.

10월 16일 10시 즈음. 부산대학교.

살벌한 분위기를 뚫고, 경제학과 정광민이 인문사회관 306호 강의실에서 <선언문>을 뿌리고 교단에 올라가 열변을 토했다. 

 “여러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저 유신 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흘려 투쟁합시다!”

삽시간에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교에 상주하던 형사와 정보부, 계엄사 요원들도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대통령 긴급조치 하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굶주린 사자가 포효하듯 우렁찬 소리가 교정을 떠나갈 듯 메웠다. 모두의 가슴에 그동안 쌓이고 쌓여있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 곧이어 누군가가 “우리의 소원은 자유”라고 ‘우리의 소원’ 가사를 바꿔 부르기 시작했고, ‘선구자’와 애국가도 함께 불렀다. 뜨거운 가슴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올랐다.

열기가 오르자 학생들은 대열을 지어 시내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전경들이 최루탄을 퍼부었지만 노도와 같은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위대가 남포동과 광복동 거리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동아대를 비롯한 대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일용직 청년 노동자, 식당 종업원, 심지어는 때밀이와 구두닦이 청년들까지 가세하여 삽시간에 불어났다. 인근 시민들은 박수를 쳤고, 물을 비롯하여 음료수를 내어놓기도 했다. 

밤이 되자 시위가 잦아지기는커녕 더욱 불어갔고 과격한 양상으로 변해갔다. 고교생까지 포함하여 청년, 시민들이 연행되었지만 한번 댕긴 불길이 번지듯 시위대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이미 시위는 학생들 차원에서 벗어나 시민항쟁의 양상으로 변해가는 모습이었다.

10월 17일 날이 밝자 시위는 계속되었다. 분노한 민중들은 파출소, 경찰서는 물론 정권의 외곽 노릇을 했던 KBS와 MBC, 부산일보, 경남도청, 중부세무서 등을 습격하고, 경찰차와 방송국 차를 불태웠다. 거리거리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구호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려 퍼졌고, 애국가가 수도 없이 불렸다.

1972년 유신체제 이후 가장 극렬하고 가장 큰 규모의 항쟁이었다. 유신의 끝자락이었던 1979년은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 독재권력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있던 시점이었다. 크리스챤아카데미사건, 안동가톨릭농민회 오원춘사건, 그리고 가발 수출업체인 YH무역 노조원 김경숙사건... 특히 YH무역의 김경숙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다 경찰이 강제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추락해 사망한 사건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박 정권은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 총재의 손발을 묶어놓기 위해 총재직 정지 가처분을 내렸고, 이어서 의원직 박탈이라는 철퇴를 휘둘렀다. 정적을 절대로 가만두고 보지 않는 박정희식의 초강수였다.

거기에다 ‘경제 안정화 정책’이라는 명분으로 일반 서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해 가난한 공장 노동자들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신발 공장과 합판공장 등 저부가 가치의 제조업이 많은 부산에서는 젊은 노동자들이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임계점에 이른 물이 끓어넘치듯,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대학생 시위가 일반 시민의 가슴에 불을 댕겼던 것이다.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공포정치를 하던 유신체제의 끝자락에 터져 나온 활화산 같은 함성이었다. 독재자는 민중의 두려움을 먹고 사는 법이다. 그러나 민중이 한번 두려움을 벗어 던지고 나면 얼마나 무서운 힘이 되어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10월 18일. 박정희는 경찰의 방어막이 뚫리자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인들을 투입했다. 장갑차와 탱크가 거리에 나타났다. 그러자 시위는 인근 도시 창원, 마산으로 번져나갔다. 마산의 경남대학교 학생들로 시작된 시위는 부산과 마찬가지로 곧 시민들이 가세한 민중항쟁으로 양상이 변해갔다.

집권당인 공화당사를 습격해 집기를 파괴하고 벽에 걸린 박정희의 사진을 내동댕이쳐 짓밟았다. 이곳 역시 파출소와 동사무소, 방송국, 신문사들이 분노한 민중의 타깃이 되었다. 마산 산업대학 학생들과 공장 직공, 점원, 날품팔이, 고교생까지 적극적으로 나섰다.

19일이 되어도 시위의 불길이 잦아들지 않고 더욱 커져 가자, 박정희 정권은 20일 마산,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인들을 대거 투입하였다.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대학과 공장, 길거리 요소요소에 배치되었다. 그래도 시위가 계속되면 곧 공수부대까지 투입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계엄사령부에서는 야간 통행금지를 2시간 연장하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여 좁은 유치장에 가두고 끔찍한 고문을 가하였다. 불순분자의 책동이나 북한의 사주를 받은 시위였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것이었다.


정말 박정희의 예언대로 다시 그런 시위가 벌어졌다면 부산과 마산에서 끔찍한 피의 대학살이 벌어지고 말았을 것인가. 역사는 아무도 모른다.

며칠 후, 10월 26일. 놀라운 소식이 신문 1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서거!'


독재자 박정희는 끝내 부마항쟁의 강제적 진압을 반대하고, 피의 대학살만은 피해야 한다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충직했던 경호실장 차지철과 함께...

그리고 그 놀라운 소식과 함께 한동안 부산과 마산을 뒤흔들었던 투쟁의 불길도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듬해 5월, 광주에서 다시 불타오르기 전까지...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