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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 안종필 이야기

기록하는 것, 생각하는 것, 함께 모이는 것 등 어느 것도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다 권력자의 몫이었고, 언론은 그저 정권의 나팔수 노릇만 하면 되는 거였다. 어느 언론사든 편집국에 중앙정보부 요원이 매일 출근해 자리를 잡고 그저 그런 잡담이나 늘어놓고 있다가, 편집부 기자들이 제목을 달거나 지면 구성을 시작하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음습한 입김을 내품었다.

“이봐, 이 기사는 사실 무근이야, 그러니 빼고. 그리고 저 기사는 윗분이 읽으면 좋아하겠어? 좀 줄여서 부드럽게...”

기자들이 늘 호락호락한 건 아니어서 어느 때 거절이라도 하면, 요원들은 득달같이 편집국장에게 달려가 다른 강도의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언론사 안에도 정의는 살아있었고 꺾일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는 결기가 있었다. 

1969년 9월 14일 3선개헌안이 변칙 처리되자 다음날 동아일보 7면에 시민들의 반응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그럴 수가’였다. 말문이 막히고 어이없는 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해 작품으로 만들어낸 사람은 당시 편집부 기자였던 안종필이었다. 

그는 1937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다니는 동안 4.19혁명을 맞아 온 몸으로 민주주의를 학습한 세대였다. 대학졸업 후, 부산일보, 조선일보를 거쳐 동아일보에 입사한지 3년쯤 지난 때였으니 젊은 피는 불의 앞에서 날카로운 펜을 만나 절묘한 문장을 만들내게 된다.

1971년과 1973년 2차에 걸친 언론자유운동이 긴급조치와 계엄령으로 무산되고 언론이 극도로 위축돼있었던 1974년 3월, 동아일보 기자 33명은 ‘신분 보장과 생활급 보장’을 요구하며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 지부를 결성했다. 그리고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발표되었다.

“우리는 자유 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 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 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한다.”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 의지가 결연하게 진행되자 회사 측과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동아일보 지면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편집부 차장이었던 안종필 역시 자유언론운동 대열에 참여하며 유신독재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나 1975년 3월 17일 부당해고에 맞서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 기자들이 회사가 동원한 폭력배들에 의해 광화문 거리로 쫓겨났다. 그때 지부장이 해고되자 안종필이 동아일보 기자협회 분회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날 결성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 위원들과 함께  ‘자유언론실천을 위한 우리의 주장’을 선창했던 안종필 역시 해고되어 길거리로 내몰리고 말았다.

1977년 5월, 안종필이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이 되면서 동아투위는 다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30일 조선일보 해직기자 모임인 조선투위와 함께 ‘민주민족언론선언’을 발표하여, 민주 언론은 ‘민중의 아픔을 같이 하는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민주화운동 단체들과 연대활동을 하며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 함께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78년 10월 24일 누구에겐가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났다. 길거리로 쫓겨난 동아투위 위원들은 언론이 날이 갈수록 권력과 금력에 아첨하는 상황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뭐든 해야 한다는 결의를 모아 민주인권일지(민권일지)를 발행했다. 

민권일지는 당시 1년간 언론에서 전혀 보도하지 않거나 보도되었더라도 정권비호와 홍보의 내용으로 왜곡된 사건들, 특히 학생운동, 종교계 사회운동, 노동운동 등의 내용을 기사화했다. 그리고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 기념일에 발행한 ‘동아투위소식’에 민권일지를 실었다. 안종필은 그렇게 ‘길거리 신문 편집장’이 되었다. 

기념식은 정보부의 방해로 장소를 구할 수 없어서 명동에 있는 한일관에서 진행되었다. 70여 명의 동아투위 위원들과 다수의 민주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포된 소식지에는 민권일지 125건과 함께 ‘자유언론을 압살하는 모든 제도와 법의 철폐’를 주장하는 <진정한 민주 민족 언론의 좌표>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그날 밤 총무 홍종민이 연행되는 것을 시작으로 안종필 위원장을 비롯해 모두 7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동아투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있는 사실이 있다고 밝혀지는 것이 그텋게도 두려운 일인가?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논리를 물리적인 힘으로 방어할 수 밖에 없을만큼 권력층의 논리는 그토록 허약한가?.... 우리는 이번 민권일지사건에서 보듯이 진실을 두려워하고 정당한 논리를 기피하며 모든 사회문제를 힘으로 처리하려는 자세가 지양될 때까지 우리의 소리를 계속 외칠 것이다.... 우리의 이땅의 진정한 민주주의와 언론자유가 꽃 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1978년 ‘동아투위소식’ 송년 특집으로 제2차 민권일지가 제작된 것과 관련하여 윤활식, 이기중, 성유보 위원이 구속되면서 총 10명의 위원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에 항의농성이 이어지고 조선투위를 비롯한 각계 단체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다. 

동아투위는 안종필 위원장을 비롯해 상임위원 대부분이 구속되자 “이 땅의 자유언론은 감옥으로 잡혀갔다”고 규정하고 이 사건을 ‘동아투위민권일지사건’으로 이름 붙여 강력한 법정투쟁을 결의하였다. 이에 이돈명 변호사를 비롯해 법조계의 양심적인 변호사 22인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해 8차에 걸친 공판과 항소심에 대응해 나갔다. 

황인철 변호사 : 지금과 같은 긴급조치 아래에서도 자유언론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종필 : 물론입니다. 긴급조치는 국가 위기 등 긴급사태에만 발동되어야 하는 인위적인 것이지만 언론자유는 하늘이 내려주신 것입니다. 구치소에 갇혀 보니 듣고 말하고 보는 것은 인간의 존재 양식, 바로 그 자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듣고 보고 말하지 못하면 미치고 맙니다. 사회도 마찬가지로 자유언론이 보장되지 않으면 썩고 미치고 맙니다.

안종필이 ‘징역 및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해 12월 4일 구속 집행정지로 출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 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징역에서 얻은 병마와 간암을 이기지 못하고 1980년 2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함세웅 신부는 추도사에서 “선생님께서 쓴 언론은 붓으로 쓴 글씨가 아니라 당신의 몸과 피로써 쓴 역사의 기록입니다.”라고 써 기자 안종필의 글과 삶을 불러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늘 미소 지으며 웃음으로 동료들에게 의지가 되고 힘이 되었던 그는 언론 자유를  억압하려는 권력에 맞서 싸우다 그렇게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민중을 위한 진정한 신문은 가로쓰기를 해야 한다. 신문이 너무 식자층 중심으로 제작되고 있기 때문에 민주를 위한 진정한 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전용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 시대가 오면 국민이 골고루 출자해 그들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그렇게 되면 편집권이 독립할 수 있을 것이다”던 그의 지론은 현실이 되어 그가 죽고 8년 뒤 국민주 모금으로 세운 언론사가 생겨나고 한글 전용 신문이 일반화되었다.

동아투위는 그를 기리기 위해 1987년부터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언론의 신장과 진실 보도에 탁월한 업적을 보인 이들’에게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수여하고 있다. 지금도 언론의 민주화가 요청되는 현실에서 바른 언론 자유언론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안종필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좌표이다.

박민나(자유기고가)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여성노동운동가 8명의 이야기' 출간(2004년 )과 한국여성노동자회 계간지 '일하는여성'에 '박민나의 삶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글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여성의 삶과 문화' 공저,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이총각 편' 연재, 뮤지컬 메노포즈 번안 등 다양한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