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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민주화운동의 선봉 - 가톨릭농민회
1976년 11월 17일, 가톨릭농민회는 현지 회원들을 중심으로 ‘함평고구마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체 피해조사에 나섰다. 전남 함평군은 해남, 무안과 함께 고구마 주산지로 매년 약 2만여톤의 고구마를 생산해내고 있었다. 그해에는 5천톤이 더 생산될 예정이었고 농협에서 인상된 가격으로 전량을 수매하겠다고 약속해 농민들은 고구마를 내다팔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수확한 고구마를 약속대로 운송이 편리한 도로변에 쌓아두었지만 농협은 약속 불이행에 대한 무책임한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일 년 내내 땀 흘려 키운 고구마가 길거리에서 썩어가자 초조해진 농민들은 농협으로 몰려갔다.
“고구마를 사가라”
“농민이 봉이냐, 약속한대로 고구마를 사가라!”
1966년 가톨릭노동청년회 농촌청년부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래, 함평고구마사건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한국사회는 1960년대부터 군부독재정권의 개발논리에 의해 저임금정책이 시행되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저가 농산물정책이 정당화되고 있었다. 농협이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해 농민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러자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농민조직을 만들었다. 가톨릭농민회이다. 1970~80년대에 일어난 거의 모든 농민문제의 해결과정에는 가톨릭농민회가 있었다. 함평고구마 사건은 파행적으로 운영되던 농협을 민주화하고 가난한 농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한 가톨릭농민회 중심의 농민운동이다.
“고구마 피해는 농협과 무관하다. 농민들의 관리소홀로 썩었다.”
그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나섰다. 이에 가톨릭농민회는 4월 22일 광주 계림동성당에서 윤공희 대주교의 집전으로 기도회를 열었다. 농민들의 사정을 외면하는 농협을 성토하며 경과보고를 하고 미사를 드린 뒤, 농협도지부장 면담을 위해 행진을 시작했지만 경찰이 막고 나섰다. 그럴수록 투쟁의 의지는 더 강고해졌다.
“함평 농민의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고구마가 노변에 눈비를 맞고 굴러 밟히는 것이야 말로 온 농민이 짓밟히는 것과 같다. 농민들이 흘린 피와 땀의 대가가 보상되고 그들의 정당한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한다.”
함평고구마사건은 전국의 가농을 통해 진상이 폭로되었고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지만 농협은 해결을 미루며 한 해가 저물었다.
1978년 4월 24일, 광주 북동성당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가농 회원 700여 명과 민주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윤공희 대주교와 농민회 지도신부단의 공동 집전으로 기도회가 열렸다. 함평 피해농민의 정당한 보상과 농협의 발전을 위해 어떠한 행동도 불사하겠다는 내용의 선언문과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다음 날부터 농민들과 지도 신부단은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농협측은 문제해결은커녕 밤 몰래 성당 주변의 현수막을 철거하고 새벽미사에 오는 신자들을 막았다.
성당이 고립되자 민주인사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경찰은 무력으로 이들을 해산시키고 20여 명을 연행해갔다. 단식투쟁 소식은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져나가 함평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4월 29일, 단식자 중 5명이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농협 측은 해결을 약속하며 지도신부단 및 농민 대표와의 회담에 응해왔다. 드디어 수매를 약속했던 고구마에 대한 피해보상금 309만원과 피해보상금 지불증을 받아내며 2년에 가까운 투쟁이 마무리 되었다. 5월1일 저녁, 남동성당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민주인사들과 함께 특별기도회가 열려 힘들었던 함평고구마 사건의 승리에 감사하는 기도회를 가졌다. 짓밟혀온 농민의 소중한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고난에 찬 투쟁 끝의 승리였다. 그러나 사건이 끝난 이후에 농협이 주정회사와 결탁하여 고구마 수매자금 80억원을 유용한 사실이 새롭게 폭로되었다. 이것은 농협민주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협은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담보하고 농민이 식량생산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데 도움이 되는 조직이어야 했다. 그러나 농민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외국농산물을 수입해 판매하는 등 농민을 어렵게 만드는 기구로 타락해가고 있었다. 가농은 농협의 문제는 농민이 직접 대표를 뽑지 못하고 정부가 임명하는 데 원인이 있다고 보고 농협민주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83년 7월 27일부터 ‘농협조합장 직선제 100만 서명운동 추진 결의대회’를 연합회별로 개최하고 범국민적인 서명운동을 전개해나갔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희망 없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밀려드는 이농현상이 가속화해 농가인구의 감소세가 확연하였고, 그 여파는 도시의 주택, 취업, 교통 등의 도시문제로 이어졌다. 농촌에 남아있는 농민들도 농사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반면 비료와 농약사용량은 급증하여 농산물 오염이 극심했졌다. 이는 국민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따라서 농협민주화 문제는 전국민적인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반상회를 통해 가농을 빨갱이로 흑색선전을 하며 서명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요하고, 농협직원과 경찰을 마을에 상주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서명에 적극 참여하는 마을에게는 새마을사업 지원자금을 회수하겠다고, 청년들에게는 영농후계자 지원금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이같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미미하나마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농민총대회에서 선출된 사람을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농협중앙회장이 조합장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가농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농협조합장 직선제 실시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나갔다. 드디어 1987년 6월민주항쟁 결과 임명제에서 직선제로 바뀌어 민선 조합장이 선출되었으나 초대회장부터 줄줄이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2012년 농협법 개혁으로 직선제는 대의원에 의해 선출되는 간선제로 바뀌었으나 가농은 여전히 제대로 된 직선제를 실시하여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가톨릭농민회는 생활공동체운동과 도시농촌연대 교류를 개척한 “한살림운동”, “우리밀살리기운동”, “우리콩살리기운동” 그리고 범교회적 참여를 이끌어낸 “우리농총살리기운동”과 “농민주일제정” 등의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특히 우리밀살리기운동은 생명공동체운동으로 새로운 대안운동으로 부상해 국민생활실천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국민의 적극적인 호응과 참여를 끌어내며 가농을 새롭게 인식시켜준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정부의 외국농축산물 수입개방과 부적절한 농업정책으로 우리 농업이 축소․ 왜곡되고 농촌공동체가 가속화돼가던 2000년대에 들어서 가농의 이러한 활동은 더욱 눈부신 것이었다. 2016년, 가톡릭농민회는 창립50주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