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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동지회 이야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 국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해외에서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함으로써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일정한 역할을 한 인사나 단체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민주동지회)도 그런 단체 가운데 하나였다. 

민주동지회는 1975년에 스위스 제네바의 가톨릭수녀원 세나클러(Cénacle)에서 세계 교회의 관심과 지원 속에서 결성되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후원해 온 기독교인들의 연대조직이다. 구성원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해외의 에큐메니컬 운동기구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중심이 되었다.

1975년 4월 박정희 정부에 의해 김관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조승혁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이 교회재정에 대한 ‘업무상 배임’ 혐의가 씌워져 구속되자 WCC를 중심으로 한 세계교회의 충격은 컸다. WCC 세계선교위원회는 같은 해 11월 6일과 7일 한국문제에 관한 긴급 비공식 모임을 소집했다. WCC 회원국 중 한국문제에 관여해온 북미, 유럽, 일본의 교회대표 200여 명이 모였다. 한국에서는 그해 나이로비에서 열릴 WCC 총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김관석, 안병무, 문동환 등이 초청되었으나 정부의 출국금지로 참석할 수 없었다. 외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 참석자들인 김재준(캐나다), 이상철(캐나다), 이승만(미국), 손명걸(미국), 김인식(미국), 오재식(일본), 최경식(일본), 장성환(독일), 이삼열(독일), 신필균(스웨덴), 박상증(스위스)은 11월 5일과 11월 8일 이틀 더 모임을 가지고 국내 민주화운동을 돕고 해외의 지원을 받기 위해 좀 더 조직적인 해외 네트워크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리하여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ICNDK, International Christian Network for Democcracy in Korea)가 결성되었다. 

임원진에는 사무총장 지명관, 사무국장 박상증, 회계 손명걸, 감사 이승만과 김인식이 포함되었으며, 중앙위원회 위원은 북미의 이상철, 이승만, 손명걸, 김인식, 홍동근, 일본의 오재식, 지명관, 김용복, 최경식, 유럽의 박상증, 장성환, 이삼열, 신필균, 국내의 이태영, 강문규 등으로 구성하였다. 

민주동지회는 한국의 김관석 목사가 주도하는 NCCK가 벌이는 인권운동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지지와 연대를 위한 국제적 여론형성 활동과 재정지원 활동이었다. 그럼에도 민주동지회는 회원 20명 정도에 불과한 일종의 언더그라운드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사무실도 따로 두지 않고 사무국장 박상증 목사의 집무실을 이용했고 은행계좌 또한 만들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한국을 돕기 위해선 조직이 전면에 드러나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조직의 이름을 내거는 공개적인 일을 하지 않아 그 이름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민주동지회가 했던 일 가운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15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철저히 비밀에 부쳐가며 일본의 진보적 시사월간지인『세카이(世界)』에 한국의 정세와 민주화운동을 소개한는 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할 수 있게 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1973년 5월부터 1988년 3월까지 ‘T.K생’이란 필명으로 매월 소개되었다. 한국 정보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T.K생이란 필명을 사용했으나 필자는 지명관 교수였다. 1년 동안 도쿄대에 교환교수로 공부하고 있던 지교수가 오랜 시간 동안 일본에 머물며 한국의 군사통치와 민주화투쟁에 관한 글을 쓸 수 있게 자료를 제공하고 재정문제도 해결하는 한 것이 민주동지회였다.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으로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국내외적으로 막혀있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전 세계의 소식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때도 아니어서 국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해외에서 국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답답해하던 시절이었다. 

민주동지회 회원들을 통해 모아지고 분석된 자료들은 독일의 파울 슈나이스 목사 등 외국인 선교사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외교관의 외교 행낭, 심지어는 여성의 브래지어나 구두 밑에 숨겨져 반출되었다. 중앙정보부가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에서 자료수집부터 반출, 원고 집필 모두가 실로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자료가 일본에 있는 지명관 교수에게 전달되면 그는 이를 바탕으로 일본어로 원고를 정리하고 그 원고는 필적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다시 야스에 료스케 편집장의 부인이 대필을 한 후 비로소 『세카이(世界)』는 출판에 들어갔다. 

이렇게 탄생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공감하고 심정적으로 동참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과 미국, 스웨덴 등의 진보적 한인 언론매체를 통해 번역되어 고국의 민주화 소식에 목마른 동포들에게 단비처럼 읽혔다. 비단 해외 뿐 아니라 국내로 역수입되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 찬 민주화의 여정에 있던 이들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독재정권의 폭압통치와 민주세력의 저항과 투쟁을 전 세계에 전하고 국내외 양심세력의 국제적인 연대를 이루어낸 대표적 해외언론이었고, 민주동지회는 그것을 있게 한 익명의 주인공이었다.

한편 1981년 4월 30일부터 5월 3일까지 13개 나라에서 40여 명의 대표들이 독일 슈투트가르트 근교 바드볼 아카데미(Bad Boll Academy)에 모였다. 후일 독일의 대통령이 된 폰 바이체커 박사, 베를린 교구의 샤프 주교도 참석했다. 이때는 전두환 정권이 기반을 다지고 있던 시기여서 앞으로 장기화가 예상되는 민주화투쟁의 전략 재편성이 요구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회의에서 중요하게 논의된 것은 민주화운동의 이념적 방향 설정 문제였으며,  “기독교인들은 독점자본주의적 체제와 공산독재체제의 비리와 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제3의 이념의 가능성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그리고 동경에 다큐센터(Documentation Centre)를 설립하여 민주화운동에 관한 정보와 문서를 수집, 해석, 배포하고, 국내교회의 발언을 대변하는 역할도 수행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민주동지회는 기관지『민주동지』를 영어, 일어, 한글로 발행하면서 다큐 센터를 통하여 국내외 언론매체의 국내정세와 민주화운동 기사를 스크랩하여 활용하였다. 민주동지회는『민주동지』외에도 『Korea Scope』를 매월 발행하였다. 코리아 스코프는 박상증 사무국장이 내용을 담당하고 그의 부인인 여성신학자 이선애도 편집을 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코리아 스코프의 발행비용은 후원금과 광고비로 충당했다. 부족한 재원 마련을 위해 박상증은 자신들의 은혼식을 가장한 행사를 열어 참석한 이들로부터 모은 4천 달러를 후원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민주동지회는 공개적으로 북한 지지를 표명하는 이들이 주도하는 단체와의 연대는 꺼려했다. 그들은 국내의 김관석 NCCK 총무가 “지금 통일문제를 이야기하면 빨갱이로 몰린다. 민주화운동을 하려면 조심해야한다”는 말을 유념하면서 그 노선을 견지했다. 자신들이 좌익으로 의심받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연대 세력까지 같은 혐의를 받게 되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런 맥락에서 민주동지회는 1981년 11월 비엔나에서 열린 ‘제1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에 함께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안전하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WCC로 하여금 통일문제를 제기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반도 평화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동북아시아 평화의 문제로 접근합으로써 간접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다가갈 것을 제의했다.

이후 1984년 10월 일본 도잔소에서 WCC 국제문제위원회와 CCA가 공동으로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 협의회를 개최하여 국제 개신교 차원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를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도잔소협의회는 북한교회를 직접 초청하였으나 북한대표단은 참석하지 못했고 회의의 축하와 성공을 비는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 명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이

은 남과 북 모두에게 큰 변화이며, 국제개신교 조직을 통한 남북문제 해결의 첫 공식회의이자 이후 남과 북의 교회뿐만 아니라 북한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민주동지회의 ‘간접적 방식’은 1986년의 스위스 글리온회의를 통해 통일론에 대한 합의는 아니지만 남북교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의지의 표명으로 연결되었고, 1988년 KNCC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으로 이어졌다. 1988년 제2차, 1990년 제3차 글리온회의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글리온 선언’을 채택하고 한반도의 평화공존과 통일을 위한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였다. 이 선언은 분단 이후 남북한 민간단체 간에 최초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있었고, 통일운동 또한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과의 관계 속에서 유지되었다. 독재정권 시기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시켜 국내의 민주화운동을 세계교회에 알리고, 세계교회들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싸우는 한국인들과 한국교회를 지원하고 연대활동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민주동지회의 이런 숨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글 어수갑
독일 유학 시절 동포운동단체인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총무부장과 한/독판 월간 <민주조국>/ 편집인 거쳐 귀국 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등 역임. 저서로는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