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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아들 박종철 - 부산의 6월항쟁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박종철은 부산의 아들이었다. 1987년 1월 14일 검찰의 발표가 거짓으로 밝혀진 것은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 등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막 열정을 꽃 피우기 시작한 한 청년의 억울한 죽음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그동안 대학가와 민주화운동 진영에 의해 진행되어 오던 민주화운동을 범국민적인 정권타도 투쟁으로 급속히 확산시켰다.
박종철의 영정은 그의 어머니가 다니던 부산의 사리암에 모셔졌다. 막판 궁지에 몰려있던 박정희 정권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부마항쟁의 열기가 신군부의 쿠데타로 힘을 받지 못하고, 이어 벌어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듣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울분이 부산 사람들 가슴에 오롯이 쌓여가던 중이었다.
2월 7일은 ‘고 박종철 범국민추도회’로 전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부산에서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이하 부민협) 임원인 노무현 변호사, 김광일 변호사, 김재규 사무국장, 고호석 사무차장 등 300여 명이 가슴에 검은색 리본을 달고 집결해 있었다. 오후 2시 전국에 있는 성당과 사찰 등 종교기관에서 타종이 시작되고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기 시작하면서 추도식이 시작되었다.
부산극장 앞에서 부민협 사무국장 김재규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추도식을 시작하자 추모인파가 급격히 늘어났다. 애국가와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자 열기가 한껏 끌어 달아올랐다. 그러자 경찰이 최루탄을 마구 쏘아댔고 추모 행렬은 바로 시위대열을 만들어갔다.
“박종철을 살려내라!”
“민주쟁취 독재타도!”
“고문정권 타도하자!”
그동안 기껏 박수나 치던 시민들이 투쟁 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밤 늦게까지 이어진 시위가 이어졌고, 수많은 군중이 모여 구호를 외치며 분노를 힘으로 결집시켜 나갔다. 이날 부산은 마치 1979년 부마항쟁의 열기 속으로 들어간 듯했고, 민주화를 열망하던 사람들은 독재정권을 끝낼 수 있겠다는 희망에 감격했다.
그날 박종철의 누나와 어머니는 명동성당 추도식에 가려고 부산역에 도착했으나 저지를 당하고 말았다. 경찰차는 취재차량을 따돌리며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모녀를 사리암에 내려놨다.
그곳은 이미 추모객들로 가득했다. 백우스님은 지치고 긴장해 위태롭게 걸어오는 두 모녀를 따뜻하게 맞았다.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두 사람은 백우스님이 이끄는 대로 타종을 시작했다.
“이제 종을 치세요. 타종은 스물한 번입니다!”
전국의 사찰과 성당에서 동시에 박종철의 나이만큼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니와 누나는 종을 치며 외쳤다.
“철아, 이 종소리 듣고 깨어나라!”
사리암의 타종은 스물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에겐 그 종소리가 박종철의 억울함을 알리는 것뿐 아니라 그 영혼을 살려내 함께 하고자 하는 간절함이었다. 끝도 없는 그들의 타종을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고문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박종철을 살려내라’라던 이 날의 외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었다. 추도식 내내 최루탄을 뒤집어쓰며 함께 했던 노무현 변호사는 네 번이나 구속영장이 신청됐으나 모두 기각되는 기록을 세웠다.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반독재운동을 하던 그의 기를 꺾으려던 검찰의 시도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이후 노무현 변호사는 6.10 민주항쟁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시위대의 선두에 서있었다.
박종철의 49재를 맞아 진행된 3.3국민평화대행진과 시민의 힘을 간과해 터트린 전두환 정권의 4·13호헌 조치 그리고 부산대 대학신문사를 대학당국이 무리하게 장악하려는 기도에 저항한 학내민주화운동 등으로 부산 또한 6.10민주항쟁의 서막을 열어가고 있었다.
5월 27일, 대학과 시민사회 모두가 역사상 가장 격렬한 반정부시위에 나서며 전국적인 저항을 진두지휘할 지도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꾸려졌다. 광범위한 민주세력이 결집되어 탄생한 국본을 빼고는 6.10민주항쟁을 말할 수 없다. 부산에서는 그보다 일주일 먼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가 결성되었다. 연일 거리로 뛰어나와 폭발하는 부산시민들의 분노가 모여 거대한 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6월 9일, 시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의 죽음은 전국을 뒤흔드는 뇌관이 되었다. 다음날 6·10민주항쟁은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명의 시민들이 집회에 참석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6.10민주항쟁의 포문을 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평범한 시민들의 평범하지 않은 일상들이 새로운 저항의 힘으로 투쟁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역사의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수산대 1학년이던 송경아도 역시 박종철고문규탄대회에 본격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게 되면서 평범했던 그의 삶이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대학 연합써클을 통해 진행되던 그의 활동이 부모님께 알려지자 그는 집을 나와 휴학을 하면서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매일 밤 최루탄을 마셔가며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부산 시민의 열정과 힘에 감동했다.
“당시 거리는 학생들의 해방구였을 거예요. 밤늦도록 같이 뛰어다니다 헤어져 아침에 만나면, 또 어젯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그는 ‘민중의 힘이 이거구나’를 느꼈고 그래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부산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은 노동자들이 시위대열에 합류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노동현장의 문제점이 첨예하게 드러나면서 노동자들의 문제의식이 높아졌다. 부산의 최대 공단인 사상공단 출퇴근길이 대학생들의 가두투쟁으로 인해 교통 정체구간이 되어갔고, 수많은 공단 노동자들이 걸어서 귀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노동자들이 시위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현장에서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며 자연히 노동현장의 문제를 제기하게 되는 경험을 쌓아가게 되었다. 결국 자신들의 요구를 시위대의 열기와 합치시켜 만들어낸 이 거대한 민중의 힘은 결국 권력을 굴복시키고 노태우 대통령으로 하여금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여 6·29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힘은 계속해서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