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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령이 발동되자 "별령이 있을 때까지 학생회, 대의원회 및 그 산하단체의 활동과 간행물 발간을 일괄금지한다" 는 공고문을 낸 사범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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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
경향신문사
기증자
경향신문사
등록번호
00712535
구분
사진
생산일자
  • 1971.10.15
  • 형태
    사진필름류
    분량
    1 페이지
    설명
    1971년 10월 15일 오전 9시 40분.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접견실로 김학열(金學烈) 경제기획원, 유재흥(劉載興) 국방, 민관식(閔寬植) 문교, 신직수(申稙秀) 법무, 김현옥(金玄玉) 내무장관 등을 불러 모았다. 10시 35분 양택식 서울시장은 위수령에 의거, 수도경비사령부에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비슷한 시각 문교장관은 서울시내 대학 총장들을 소집, 데모 주동 대학생의 명단을 전달하면서 이들을 17일까지 제적시키라고 지시했다.10시 50분 김성진(金聖鎭) 청와대 대변인은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 을 발표했다. ‘10ㆍ15 조치’ 위수령 발동이었다. 군사정부의 문교정책은 69년 3월 1일 구체화 했다. 대학을 병영화, 장기집권을 위한 상아탑의 순치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차 목표는 대학생 교련과목의 신설이었다. “국가가 총무장한다는 전제 아래 적령기 대학생들이 군사교육을 받음으로써 유사시에 대비한다” 고 목적을 밝혔다. 그 해 10월17일 대통령 3선 개헌 국민투표가 통과됐다. 이듬해 2월 23일 국무회의는 대학 교련 개정안을 확정, 새학기부터 당장 시행토록 했다. 종래의 예비역교관을 현역으로 바꾸고, 매주 2시간씩 3학년까지 실시해오던 훈련을 매주 3시간씩 4년간 총 711시간을 이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711시간 이수자에게는 현역 복무기간을 6개월 단축하는 혜택을 주기로 했다. 개학과 동시에 대학은 교련 철폐 요구로 들끓었다.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3선에 성공했다. 서울대 고대 성균관대 등은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 을 결성하고 4ㆍ27 선거를 불법ㆍ부정ㆍ관권 선거로 규정했다. 교련반대는 반정부로 이어졌고, 부정선거 규탄은 군사교육거부로 상징화 했다. 문교부는 5월 27일 서울대에 휴업령을 내렸고, 6월1일 서울대는 처음으로 데모 학생에 대해 자체 징계조치(제명 3, 자퇴권유2, 무기정학 17명)를 내렸다. 10월 15일 오전 11시 50분 고려대. 수경사 병력이 2대의 장갑차와 함께 진주했고, 16대의 군용 트럭을 타고 200여명이 출동했다. 눈에 띈 학생 중 여학생과 ROTC후보생을 제외한 전원이 연행됐다. 학생회관과 주요 강의실에 최루탄이 발사됐다. 학생들은 최루탄을 피해 3~4층 유리창에 매달리다 떨어지기도 했고, 여학생들은 가스에 질식해 소방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오후 3시쯤 7대의 장갑차가 추가 배치됐다. 정오 연세대. 공수단 600여명이 진주했다. 이날 오전 전학련(전국학생연맹)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었다. 당시 전학련 대의원 손예철(孫叡徹ㆍ당시 서울대 중문과3ㆍ현 한양대 인문학연구소장)씨의 회고. “14일 명동 흥사단본부에서 회의를 열고 신경식(한국외대 행정학과4)을 위원장으로 선출하는 등 전학련 임원진을 확정하면서 학원민주화를 위한 전국 대학의 연대감을 확인했다. 15일 오전 11시 연대 교수식당에서 전학련 공식 출범 기자회견을 가졌다. 회견 도중 어느 기자가 조금 전 위수령이 발표됐다며 대책을 물었다. 우리는 ‘끝까지 투쟁하겠다’ 고 대답했다. 회견장 밖 창문을 통해 무장 군인들이 캠퍼스에 배치되는 모습이 보였다. 낮 12쯤이었다. 서둘러 회견을 마치고 우리는 뒷문으로 도피했다.” 이어 서울대와 경희대, 성균관대, 한국외대, 서강대에도 중무장한 군인들이 장갑차와 군용트럭 등을 타고 들어왔다. 이날 오후 서울의 7개 대학과 전남대에 무기한 휴업령이 내려졌다. 당국은 이날 하루 동안 서울에서 학생 1,889명을 연행했다고 밝혔다. 각 대학은 17일 주동 학생 174명을 제적했다고 문교부에 신고했다. 당국은 제적된 학생들이 재입학하거나 편입학하지 못하도록 학칙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전국 84개 대학이 자체적으로 학칙을 개정해 문교부의 승인을 받았다. 국방부는 문교부로부터 제적 학생의 명단을 넘겨받아 1차로 47명에 대해 입영 영장을 발부했다. 주동학생제적, 학칙 개정, 영장 발부 등을 완료한 당국은 23일 오전 각 대학에 주둔한 위수군에 대해 철수명령을 내렸다(위수령 해제는 11월 9일). 데모 주동자와 제적 학생의 명단을 넘겨받은 당국은 전국에 이들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연행된 학생들은 수도통합병원에서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은 후 곧바로 징집됐다. 학생 30명이 1차로 10월 26일 용산역에 집결했다. 그들은 오후 7시 40분발 285군용열차로 논산훈련소로 실려 갔다. 28일 2차 입영이 있었고, 이후 검거된 학생들은 그때마다 개별적으로 강제 징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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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10월 15일 대학교 위수령 발동
    서울대생내란예비음모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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