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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내란예비음모사건

1971년 하반기는 박정희 정권이 1인독제 체제를 강화해 가는 때였다. 이에 맞선 국민들의 저항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민주수호국민협의회(공동대표 김재준· 이병린 · 천관우)의 발족, 언론인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 법관들의 사법권 독립추구, 교수들의 학원자주 선언, 전태일 분신(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 빈민들의 광주대단지 사건(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 교련철폐투쟁 등 4월혁명(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 이후 억압되었던 각종 민주화운동이 분출되던 시기였다. 10월 14일 열기로 예정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전국학생연맹)의 전국대의원대회를 경찰이 원천봉쇄한 데 이어 10월 15일에는 ‘학원질서확립을 위한 특별법령’을 발표하고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발포한 후 서울 시내 7개 주요대학에 군이 진주하여 1,889명의 학생을 연행했다. 이에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11월 8일 학원자유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런 긴장된 상황 속에서 1971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면서, 전국학생연맹 위원장 심재권(서울대 상대 3년), 󰡔자유의 종󰡕 발행인 이신범(서울대 법대 4년), 장기표(서울대 법대 3년), 조영래(사법연수원생), 김근태(서울대 상대 3년) 등을 구속했다. 이들은 10월 15일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되었으며, 이들에게 주어진 혐의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 폭력을 이용한 주요 관공서 파괴·점령과 박정희 대통령 강제 하야, 혁명위원회 구성과 헌법 기능 정지 후 정부 전복 기도를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사건의 조작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조영래의 사법연수원 동기생들인 사법연수원 3기생 70여 명은 11월 17일 정오 사법연수원 강당에 모여 내란 예비 음모 혐의로 구속된 동기생 조영래가 정식 구속되기에 앞서 영장 없이 구속 상태에 있음에 관하여 논의하고, 대법원장과 사법연수원장에게 건의문을 내기로 결의하는 등 본 사건에 내재된 부당성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또한 배정연 등 7명의 변호사는 이신범, 심재권 등 2명의 범죄 사실 자백은 일선 수사기관에서 수사관으로부터의 폭행 등 강요에 의해 할 수 없이 한 것이므로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이 수사기관에서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미리 감정해 줄 것을 내용으로 하는 증거 보전 신청을 서울형사지법에 제출하였다. 증거 보전 신청 사건을 담당한 최병륜 판사는 12월 1일 이의 신청을 받아들여 법원 구내 의사 이성재에게 이들의 상해 부위와 상해 정도, 상해 원인 등을 감정하도록 요청했다.

수차례 재판으로 피고인, 변호인, 변호인 측 증인들이 공소 사실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무죄를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5월 1일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논고를 통하여 “비록 이 사건이 모의 단계에서 끝났다고는 하나, 나라의 장래를 짊어진 학생들의 시국을 망각한 이 같은 경거망동은 엄벌해야한다”고 말하면서, 4명의 피고인 전원에게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하였다. 선고 공판에서 반국가단체 구성과 예비 음모 부분만 무죄를 판시한 채 기타의 부분은 유죄를 인정하고, 이신범과 장기표 피고인에게 각각 징역 4년을, 조영래와 심재권 피고인에게 각각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검찰은 9월 5일의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도 징역 10년씩을 구형하였는데, 재판부는 9월 11일 형량을 낮추어 장기표와 심재권 피고에게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이신범 피고에게는 징역 2년을, 조영래 피고에게는 징역 1년 6월을 각각 선고하였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통령에게 더욱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국가보위특별법을 12월 26일 새벽 신민당 의원들이 배제된 채 전격 통과시킴으로써 1인독재의 길로 본격적으로 치닫게 되었다.

서울대생내란예비음모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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