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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김상진할복자살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헌법을 통해 1인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0월 유신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들을 부정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켜 1970년대 내내 국민적 반독재투쟁을 확대발전시켰다. 박정희 정권은 한편으로는 유신헌법을 통해 강력한 사회 통제력을 보유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이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반독재 투쟁 또한 확대 강화시켰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라는 폭력적이고 탄압적인 수단으로 사회전반을 통제하고 정권을 유지하였다.

1975년은 유신이후 유신철폐, 민주회복 국민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진 한해였다. 긴급조치 1, 4호 해제 이후 사회 각 계층으로 확대된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악화일로에 있는 국제여론과 함께 유신정권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2월 15일 긴급조치 1, 4호 관련자(민청학련관련자) 중 인혁당과 민청학련 관련자 4명을 제외하고는 전원 석방하였다. 구속자들의 석방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분위기를 한층 고양시켰다. 3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의 해고와 이들의 투쟁이 이어졌고, 대학가는 개강과 함께 석방학생들의 복학문제, 학원자유와, 유신철폐 등을 주장하는 반독재 유신반대 시위가 계속되었다. 4월 들어 8일 긴급조치 7호가 선포되어 고려대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대법원은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원심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다음날 새벽 인혁당 관련자 7명과 민청학련의 여정남 등 8명에 대해 사형집행이 이루어 졌다.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된 유신정권의 만행이었다.

이러한 반유신투쟁의 격랑 속에서 4월 11일 서울대 농대 축산과 학생인 김상진이 농대 학생들 성토장에서 양심선언문을 읽은 후 할복자살을 하게 된다. 김상진의 죽음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커다란 충격이었다. 서울농대 학생들은 3월 28일 학생총회를 통해 제1차 대학선언과 제2차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원자유보장,’ 구속학생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어 4월 2일과 4일에 연이어 시위가 벌어졌고, 4일 시위로 축산과 4년 김명섭과 학생회장 황연수(농경제과 4년)가 연행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11일 11시 농대 대강당 앞 잔디밭에 3백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자유성토에 들어갔다. 11시 30분께 김상진 군이 세 번째 연사로 등장하여 양심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자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까지 읽고 품안에서 칼을 꺼내 왼쪽 하복부를 찔러 자결하였다. 김상진은 병원에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급송 중이던 4월 12일 아침 8시경 사망했다.

국제적으로는 김상진의 할복자살 이후인 4월 말 월남이 공산화되었다. 이를 빌미로 박정희 정권은 5월 13일 유신체제가 붕괴하기까지 지속되는 가장 강력한 긴급조치9호를 선포한다. 그러나 서울문리대 4학년생을 중심으로 한 가면극회와 문학회, 사범대 3학년생을 중심으로 한 야학문제연구회 그리고 71년 위수령으로 제적되었다가 복학한 학생들이 ‘죽은 사람도 있는데 구속되는 것이 무슨 문제냐’는 굳은 각오로 5월 22일 김상진군 장례식 및 추도식을 거행한 수 대규모 시위(오둘둘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후의 첫 시위로 유신정권의 강경한 탄압으로 많은 구속자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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