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4월 19일 시위

1960년에 일어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했다. 4․19혁명은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당일의 3․15 마산 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 제2차 마산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 그리고 4․18 고려대생 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에 이어 절정에 이른 4월 19일의 대규모시위와 4․25 대학교수단 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로 전개되었다. 1960년 4월 19일, 3․15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규탄하고 마산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지방에서 발생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하여 4월혁명의 정점이 되었다. 이날 아침 조간신문을 펼쳐 본 학생과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1면 머리기사로 고려대생 데모에 대한 상보가 실려 있고, 깡패들의 데모대 습격 전말이 사회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더구나 고려대생 1명은 깡패에게 맞아 절명한 것 같다는 미확인 보도(후일 오보로 확인됨)까지 게재되어 있었다. 이미 여러 날 전부터 학교별로 은밀히 데모를 준비해 온 서울대·연세대·건국대·중앙대·경희대·동국대·성균관대 등 10여 개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데모 계획이 아직 없었던 학교의 학생들마저 깡패 습격 보도를 접하고 분노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큰 규모의 시위와 유혈 사태가 일어나 이승만 정권을 결정적인 국면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19일 오전 8시 30분쯤 선언문과 격문을 보던 서울대 문리대생들과 대광고교생 1,000여 명이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넘어뜨리고 함성을 지르며 9시 20분경 교문을 나서자 부근에 있는 법대생, 미대생들이 합세했다. 10시 30분경 3천여 명의 서울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모였고, 뒤이어 서울대 사대와 상대, 건국대생들이 달려왔다. 동성고 학생들과 고려대생도 나왔다. 동국대생 2천 명이 11시경 쏟아져 나온 것을 비롯해 연세대, 중앙대 등 여러 대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의대생들은 흰 가운을 입고 나왔다. 중・고생들도 속속 참여했다. 11시 50분경 동국대생들이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과 조선총독 관저였고, 당시에는 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현 청와대)쪽으로 향하면서 시위 양상은 바뀌었다. 다른 대학 학생들과 동성고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때부터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나왔다. 실업자,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도 데모에 합세했다. 오후 1시 40분경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일제히 발사해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2시 50분경에는 중앙청 부근 무기고에서 경찰의 무차별 발사로 8명이 숨졌다. 시위대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으로 몰려들기 직전 이기붕은 6군단사령부로 피신했다. 2시 반경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늘어나 서울 시내 주요 거리는 시위대 물결로 뒤덮였다. 5시 이후에도 광화문에서 세종로, 서울시청 일대에서 경찰과 시위대 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에 불이 치솟는 등 건물 26개소가 파괴되었다. 이날 시위로 서울에서 104명이 사망했다.

이승만 정부는 2시 40분경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을 홍진기 내무장관 제의로 1시로 소급해 선포했다.(계엄사령관 송요찬 육군참모총장) 4시 반에는 부산・대구・광주・대전에도 경비계엄이 선포되었고, 5시에는 서울 등 5개 도시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에도 곳곳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서울 지역 출동명령을 받은 육군 15사단은 밤 8시에 서울 동쪽에 있는 중량교 부근에 집결해 10시에 동대문, 종로를 거쳐 중앙청에 들어왔다. 계엄군은 공포탄을 지급받으면서 발포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4월 19일의 데모는 거의 전국적인 규모였다. 부산에서는 경남공고, 데레사여고, 부산상고 등 고교생의 데모가 일어나 시민들과 합세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는데, 계엄이 선포된 오후 5시를 전후하여 부산진경찰서와 동부산경찰서에서 발포하여 13명이 목숨을 잃었고, 마산 등지에서도 1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광주에서는 광주고생 및 전남대생과 시민들 수천 명이 데모를 벌이다가 밤 9시 25분경 경찰의 발포로 8명이 희생되었다.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인천 등에서도 데모가 일어났으나 경찰이 발포를 하지 않아 희생자는 생기지 않았다.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불린 4월 19일 시위는 부정선거 반대 규탄으로부터 시작된 4월혁명이 반독재투쟁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4월혁명사료총집발간위원회 편,『4월혁명 사료총집』 1책 일지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김정남 저, 『4․19혁명』

사료소개

1,731건의 사료가 소장되어있다. 박용수 선생과 경향신문사가 생산한 4.19관련 각종 사진 219 건 중 박용수 선생이 기증한 사진은 주로 4.19 정신을 이은 민주화운동 관련 사진이고 경향신문사의 사진은 4.19 당시의 것들이다. <4.19 23주년 기념행사 자료집-부활과 4월혁명(대한가톨릭대학생연합회,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등록번호 : 73822) 등 각종 4.19기념행사 자료집, <4.19영령은 통곡한다! 군부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민주주의와 민족자주 쟁취를 위한 노동자투쟁위원회)>(등록번호 : 79241) 등의 성명서, <4.19 38주년에 즈음하여 민주개혁과 자주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시국선언(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등록번호: 332903) 등의 선언문, KCYF재호 한인 기독청년회 제1권 5호-조국의 민주주의를 기원한다-4.19학생혁명 25주년을 맞아(재호한인기독청년회)(등록번호 : 325180) 등의 재외단체 간행물 등 비교적 다양한 관련사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4월 19일 시위

1960년에 일어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했다. 4․19혁명은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당일의 3․15 마산 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 제2차 마산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 그리고 4․18 고려대생 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에 이어 절정에 이른 4월 19일의 대규모시위와 4․25 대학교수단 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로 전개되었다. 1960년 4월 19일, 3․15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규탄하고 마산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지방에서 발생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하여 4월혁명의 정점이 되었다. 이날 아침 조간신문을 펼쳐 본 학생과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1면 머리기사로 고려대생 데모에 대한 상보가 실려 있고, 깡패들의 데모대 습격 전말이 사회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더구나 고려대생 1명은 깡패에게 맞아 절명한 것 같다는 미확인 보도(후일 오보로 확인됨)까지 게재되어 있었다. 이미 여러 날 전부터 학교별로 은밀히 데모를 준비해 온 서울대·연세대·건국대·중앙대·경희대·동국대·성균관대 등 10여 개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데모 계획이 아직 없었던 학교의 학생들마저 깡패 습격 보도를 접하고 분노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큰 규모의 시위와 유혈 사태가 일어나 이승만 정권을 결정적인 국면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19일 오전 8시 30분쯤 선언문과 격문을 보던 서울대 문리대생들과 대광고교생 1,000여 명이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넘어뜨리고 함성을 지르며 9시 20분경 교문을 나서자 부근에 있는 법대생, 미대생들이 합세했다. 10시 30분경 3천여 명의 서울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모였고, 뒤이어 서울대 사대와 상대, 건국대생들이 달려왔다. 동성고 학생들과 고려대생도 나왔다. 동국대생 2천 명이 11시경 쏟아져 나온 것을 비롯해 연세대, 중앙대 등 여러 대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의대생들은 흰 가운을 입고 나왔다. 중・고생들도 속속 참여했다. 11시 50분경 동국대생들이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과 조선총독 관저였고, 당시에는 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현 청와대)쪽으로 향하면서 시위 양상은 바뀌었다. 다른 대학 학생들과 동성고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때부터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나왔다. 실업자,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도 데모에 합세했다. 오후 1시 40분경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일제히 발사해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2시 50분경에는 중앙청 부근 무기고에서 경찰의 무차별 발사로 8명이 숨졌다. 시위대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으로 몰려들기 직전 이기붕은 6군단사령부로 피신했다. 2시 반경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늘어나 서울 시내 주요 거리는 시위대 물결로 뒤덮였다. 5시 이후에도 광화문에서 세종로, 서울시청 일대에서 경찰과 시위대 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에 불이 치솟는 등 건물 26개소가 파괴되었다. 이날 시위로 서울에서 104명이 사망했다.

이승만 정부는 2시 40분경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을 홍진기 내무장관 제의로 1시로 소급해 선포했다.(계엄사령관 송요찬 육군참모총장) 4시 반에는 부산・대구・광주・대전에도 경비계엄이 선포되었고, 5시에는 서울 등 5개 도시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에도 곳곳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서울 지역 출동명령을 받은 육군 15사단은 밤 8시에 서울 동쪽에 있는 중량교 부근에 집결해 10시에 동대문, 종로를 거쳐 중앙청에 들어왔다. 계엄군은 공포탄을 지급받으면서 발포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4월 19일의 데모는 거의 전국적인 규모였다. 부산에서는 경남공고, 데레사여고, 부산상고 등 고교생의 데모가 일어나 시민들과 합세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는데, 계엄이 선포된 오후 5시를 전후하여 부산진경찰서와 동부산경찰서에서 발포하여 13명이 목숨을 잃었고, 마산 등지에서도 1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광주에서는 광주고생 및 전남대생과 시민들 수천 명이 데모를 벌이다가 밤 9시 25분경 경찰의 발포로 8명이 희생되었다.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인천 등에서도 데모가 일어났으나 경찰이 발포를 하지 않아 희생자는 생기지 않았다.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불린 4월 19일 시위는 부정선거 반대 규탄으로부터 시작된 4월혁명이 반독재투쟁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4월혁명사료총집발간위원회 편,『4월혁명 사료총집』 1책 일지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김정남 저, 『4․19혁명』

사료소개

1,731건의 사료가 소장되어있다. 박용수 선생과 경향신문사가 생산한 4.19관련 각종 사진 219 건 중 박용수 선생이 기증한 사진은 주로 4.19 정신을 이은 민주화운동 관련 사진이고 경향신문사의 사진은 4.19 당시의 것들이다. <4.19 23주년 기념행사 자료집-부활과 4월혁명(대한가톨릭대학생연합회,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등록번호 : 73822) 등 각종 4.19기념행사 자료집, <4.19영령은 통곡한다! 군부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민주주의와 민족자주 쟁취를 위한 노동자투쟁위원회)>(등록번호 : 79241) 등의 성명서, <4.19 38주년에 즈음하여 민주개혁과 자주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시국선언(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등록번호: 332903) 등의 선언문, KCYF재호 한인 기독청년회 제1권 5호-조국의 민주주의를 기원한다-4.19학생혁명 25주년을 맞아(재호한인기독청년회)(등록번호 : 325180) 등의 재외단체 간행물 등 비교적 다양한 관련사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