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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규 의문사 사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치열한 투쟁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치열함만큼 큰 희생을 치러야했다. 민주화운동 투쟁과정에서 수많은 구속, 수배, 고문, 투신, 분신이 있었다. 그리고 공권력의 폭력에 의한 죽음과, 또한 그것을 자살과 변사체로 은폐한 수많은 의문사가 있었다. 학생운동 전력으로 강제징집되어 프락치 강요를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군의문사를 비롯하여 학생운동, 빈민운동, 노동운동 곳곳에서 의문사가 일어났다. 이들은 ‘자살’이라는 군의 일방적 통보를 도저히 믿기 어려운 곳에 총알자국이 났거나, 바다나 철로변의 변사체로, 동굴이나 산에서 목을 맨 채로 혹은 산이나 건물에서 떨어진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노태우 정권이 집권하던 1989년 5월 10일 광주 청옥동 제 4수원지에서 참혹한 모습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지명수배된 조선대 학생 이철규였다. 이철규 의문사 사건은 노태우 정권 시기에 일어난 198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이다.

1982년 조선대에 입학한 이철규는 1985년 '반외세반독재투쟁위원회' 활동으로 구속되었고, 1987년 석방된 후 전횡을 일삼던 박철웅 총장에 대한 학원민주화투쟁을 전개하여 조선대 재단을 몰아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었다. 1989년 이철규는 조선대 교지인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으로 이 교지에 「미제 침략 백년사」라는 논문을 게재,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4월 18일부터 지명수배를 받은 상태였다. 검찰, 경찰, 안기부, 보안사 등 전남공안합수부는 『민주조선』관련 전담반을 편성했으며, 특히 이철규 체포에는 현상금 3백만원과 1계급 특진이 걸려있었다. 이철규는 5월 3일 밤 광주시 청옥동 제4수원지 부근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은 뒤 1주일 만인 5월 10일, 검문 장소에서 76m쯤 떨어진 수원지 물 속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물 위에 떠 있었던 그의 얼굴은 왼쪽 눈알이 돌출된 채 새까맣게 변해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상해 있었고, 전신은 피멍이 들고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5월 11일 전남지역의 대학교수와 재야인사를 비롯해 학생들을 중심으로 ‘애국학생 고 이철규 열사 고문살인 규명 대책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또한 학생과 시민 1만여 명은 이철규의 시신이 안치된 전남대 앞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고, 조선대 교수 50여 명은 전남대 병원에서 전남도청 앞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5월 14일 수사당국은 이철규의 사망원인을 ‘단순익사’라고 발표하였다. 연일 “이철규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가 이어졌다. 이철규 열사 사인 진상규명투쟁은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 반대와 민주주의 사수를 위한 운동으로 확대되어 전국화 되었다. 5월 25일부터 전남대 영안실 앞과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단식농성이 시작되었고, 4백여 명이 참여한 명동성당의 단식농성은 17일간 계속되었다. 5월 27일 국회는 이철규 변사 사건 조사특위를 구성하고 진상규명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6월 1일부터 광주 현지에서 국정감사를 실시했다. 한편 검찰은 5월 30일 ‘실족 후 익사’라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그러나 이철규 사망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투쟁은 계속되었다. 6월 10일 전대협 소속 대학생 4천여 명은 서울 종묘공원에 집결, 이날 오후 명동성당에서 가지려했던 ‘이철규열사 사인은폐조작 규탄 및 6월민중항쟁 계승대회’가 경찰에 의해 무산된 데 항의, 1시간여 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KBS와 MBC 노조도 이철규 의문사 특집프로그램의 전국 방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유족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는 미국 인권의사회 소속의 저명한 법의학자를 초청해 재부검을 시도했으나 검찰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철규의 장례식은 1989년 11월 4일 사망한 지 178일 만에 조선대에서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시작했으나 이 사건에 안기부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일부 사실을 확인했지만 국정원의 내사자료 거부 등으로 2002년 조사 불능 결정을 내렸다.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89년 안기부 광주지부 한 간부의 업무일지를 입수해 조사한 결과 이철규의 죽음에 안기부가 조직적으로 개입을 했다고 밝혔다. 안기부의 개입은 당시 조선대 학내민주화운동의 성과로 총장에 취임한 이돈명 변호사를 『민주조선』발간과 연관시킴으로써 퇴진시켜 조선대 학내민주화를 막겠다는 목적과 당시 이철규 열사가 활동했던 조직에 대한 수사를 통해 광주지역 학생운동조직을 와해시키려는 목적이었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으며, 현재 계류 중이다.

주요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편 4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보고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희망세상』2006년 1월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 『죽음, 진상규명 20년 그리고 국가기구 조사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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