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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진 분신 사건

1986년은 노사분규에 참여한 노동자가 급증한 시기였다. 노사분규의 원인은 임금인상과 체불임금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1월부터 4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1986년 상반기 노동운동은 서울 구로지역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전국적인 인금인상투쟁의 열기가 상승했다. 이런 가운데 1986년 3월 17일, 서울 구로구 소재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이 인금인상투쟁 중 경찰과 대치 끝에 회사 옥상에서 분신했다. 450여 명의 노동자가 근무하는 신흥정밀은 초임이 3080원의 저임금에다 기본근무시간이 9시간으로 강제되어 있고, 연차 월차 생리수당은 지급되지 않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가진 회사였다. 이에 노동자들은 ①초임 4200원으로 인상 ②하루 기본근무시간 8시간 정상화, ③강제잔업과 철야 특근 철폐, ④부당해고 철회 등을 요구했다.

신흥정밀 노동자들은 1986년 3월 7일부터 지속적인 유인물 작업을 통해 노동상황을 알려나갔다. 3월 17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전 종업원과 함께 투쟁을 전개할 계획이었으나 회사 측이 미리 알고 점시시간을 일방적으로 연기해 방해함에 따라 박영진을 포함한 몇몇 노동자들은 식당에서 성명서를 낭독하고 요구사항을 외쳤다. 즉각 경찰이 투입되고 옥상까지 밀려올라가 경찰과 대치하게 된 박영진은 온몸에 석유를 붓고 성명서에 불을 붙인 후 경찰이 물러날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은 방치한 채 동료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내리는데 급급했다. 경찰들은 박영진이 쓰러질 때까지 10여 분을 기다렸다가 담요로 덮고 동료들을 경찰서로 연행한지 20분이 지난 다음인 3시경에야 강남성심병원으로 옮겼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온 몸에 화상을 입었으나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 등의 말을 남기고 3월 18일 새벽에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회사측이 박영진의 부친을 기만하고 회유를 시도했다. 박영진의 부친을 찾아온 회사측 관리자는 10만원을 건네주면서 박영진의 퇴사를 종용하면서 퇴사처리 후 계속적인 치료를 해주겠다고 했다. 박영진의 부친이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갖은 기만과 회유로 타협을 시도했다. 강남성심병원에는 사복경찰과 전경이 배치되었다. 경찰은 시신을 지키고 있던 노동자와 박영진의 운명을 지켜보러 온 문익환 목사 등 민주인사들을 강제로 귀가시키고 시신을 탈취하여 그들 마음대로 벽제화장터에서 화장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박영진은 1984년 9월 동일제강에 입사하여 1985년 3월 노조결성 후 노조사무장에 선출되어 민주노조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하다 강제해고 당하고 1985년 10월 신흥정밀에 입사했다.

주요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 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보고서』 이원보 저 『한국노동운동사5』

사료소개

‘박영진’ 조건으로 총 109 건이 검색되었다. <고 박영진 열사가 여성 동료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등록번호 : 211071) 박영진이 분신하기 이틀전 자신의 생각과 심경을 담담하게 쓴 육필 편지, 이 편지를 쓸 당시의 박영진 열사 주변 정황을 짐작해볼 수 있는 자료, <박영진 동지의 약력과 투쟁경력> (등록번호 : 095213) 박영진의 성장과정, 의식화과정, 투쟁과정이 일지형식으로 쓰여진 자료, <경찰의 시신 탈취를 막기 위해 출입구를 몸으로 막는 사람들> (등록번호 : 700928) 박용수 사진, <노동투사 박영진 동지 장례투쟁 보고서> (등록번호 : 095104), <박영진 열사 장례식 팜플렛> (등록번호 : 326761) 박영진의 약력과 투쟁경력, 분신 이후 노동자와 민주인사의 투쟁 경과, 편지 내용 등 소개, <박영진의 장례식을 몰래 지켜보던 양주경찰서 형사들에게 노동자들이 달려들자 이를 말리는 문익환 목사와 이소선 여사> (등록번호 : 700981) 등은 시신을 둘러싼 긴박하고 암울했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영진 분신 사건

1986년은 노사분규에 참여한 노동자가 급증한 시기였다. 노사분규의 원인은 임금인상과 체불임금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1월부터 4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1986년 상반기 노동운동은 서울 구로지역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전국적인 인금인상투쟁의 열기가 상승했다. 이런 가운데 1986년 3월 17일, 서울 구로구 소재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이 인금인상투쟁 중 경찰과 대치 끝에 회사 옥상에서 분신했다. 450여 명의 노동자가 근무하는 신흥정밀은 초임이 3080원의 저임금에다 기본근무시간이 9시간으로 강제되어 있고, 연차 월차 생리수당은 지급되지 않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가진 회사였다. 이에 노동자들은 ①초임 4200원으로 인상 ②하루 기본근무시간 8시간 정상화, ③강제잔업과 철야 특근 철폐, ④부당해고 철회 등을 요구했다.

신흥정밀 노동자들은 1986년 3월 7일부터 지속적인 유인물 작업을 통해 노동상황을 알려나갔다. 3월 17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전 종업원과 함께 투쟁을 전개할 계획이었으나 회사 측이 미리 알고 점시시간을 일방적으로 연기해 방해함에 따라 박영진을 포함한 몇몇 노동자들은 식당에서 성명서를 낭독하고 요구사항을 외쳤다. 즉각 경찰이 투입되고 옥상까지 밀려올라가 경찰과 대치하게 된 박영진은 온몸에 석유를 붓고 성명서에 불을 붙인 후 경찰이 물러날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은 방치한 채 동료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내리는데 급급했다. 경찰들은 박영진이 쓰러질 때까지 10여 분을 기다렸다가 담요로 덮고 동료들을 경찰서로 연행한지 20분이 지난 다음인 3시경에야 강남성심병원으로 옮겼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온 몸에 화상을 입었으나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 등의 말을 남기고 3월 18일 새벽에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회사측이 박영진의 부친을 기만하고 회유를 시도했다. 박영진의 부친을 찾아온 회사측 관리자는 10만원을 건네주면서 박영진의 퇴사를 종용하면서 퇴사처리 후 계속적인 치료를 해주겠다고 했다. 박영진의 부친이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갖은 기만과 회유로 타협을 시도했다. 강남성심병원에는 사복경찰과 전경이 배치되었다. 경찰은 시신을 지키고 있던 노동자와 박영진의 운명을 지켜보러 온 문익환 목사 등 민주인사들을 강제로 귀가시키고 시신을 탈취하여 그들 마음대로 벽제화장터에서 화장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박영진은 1984년 9월 동일제강에 입사하여 1985년 3월 노조결성 후 노조사무장에 선출되어 민주노조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하다 강제해고 당하고 1985년 10월 신흥정밀에 입사했다.

주요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 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보고서』 이원보 저 『한국노동운동사5』

사료소개

‘박영진’ 조건으로 총 109 건이 검색되었다. <고 박영진 열사가 여성 동료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등록번호 : 211071) 박영진이 분신하기 이틀전 자신의 생각과 심경을 담담하게 쓴 육필 편지, 이 편지를 쓸 당시의 박영진 열사 주변 정황을 짐작해볼 수 있는 자료, <박영진 동지의 약력과 투쟁경력> (등록번호 : 095213) 박영진의 성장과정, 의식화과정, 투쟁과정이 일지형식으로 쓰여진 자료, <경찰의 시신 탈취를 막기 위해 출입구를 몸으로 막는 사람들> (등록번호 : 700928) 박용수 사진, <노동투사 박영진 동지 장례투쟁 보고서> (등록번호 : 095104), <박영진 열사 장례식 팜플렛> (등록번호 : 326761) 박영진의 약력과 투쟁경력, 분신 이후 노동자와 민주인사의 투쟁 경과, 편지 내용 등 소개, <박영진의 장례식을 몰래 지켜보던 양주경찰서 형사들에게 노동자들이 달려들자 이를 말리는 문익환 목사와 이소선 여사> (등록번호 : 700981) 등은 시신을 둘러싼 긴박하고 암울했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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