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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단체협의회 결성

1987년 6월민주항쟁의 과정을 거치며 각 부문 운동의 통합조직들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경우 개신교와 가톨릭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주적인 군 단위 농민회를 결성하기 시작했고, 이를 토대로 1987년 2월 26일에는 전국농민협회가 결성되었다. 1987년 대선 이후 전면적인 농축산물 수입자유화가 발표되자, 낙농·육우 농민들을 시발로 양계, 포도 농민에 이르기까지 수입개방 저지투쟁을 대규모로 벌였다. 이 투쟁을 통해 생산자단체들이 처음으로 투쟁의 주체로 부각되었다. 이후 농민운동단체들은 이들 생산자단체와의 상층 연대를 통해 1988년 4월 22일 ‘농축산물 수입저지 전국농민대회’ 공동 개최, 5월 26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농축산물 수입반대 전국농민결의대회’등을 개최했다.

이후 한미무역실무회의를 통해 쇠고기, 유제품, 과일류, 담배 등 농축산물 수입이 전면화 됨에 따라 생산 농민들의 위기는 더욱 커지게 되었으며, 작목별 생산자단체들 역시 공동대처를 절박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대정부협상 차원에서 얻어낼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생산자단체 지도부는 그간의 타협적, 기회주의적 성향에서 점차 탈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0월 30일 13개 농민단체들의 범 농민적 협의기구인 전국농민단체협의회(전농협)를 결성했다. 이들은 결성선언문에서 “농민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미국 농축산물 수입개방이 노태우 정권의 등장과 함께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며, 농민의 생존권과 민족의 자립경제를 이룩하기 위해 단체를 결성한다고 밝히고, 토지기본법 개정, 곡가결정과정에 농민 참여 제도화, 농협·축협·수협의 민주화, 농가부채 탕감, 남북한 농민교류 등을 주장했다.

전국농민단체협의회는 출범하자마자 농축산물 수입개방 저지와 제값 받기를 위한 전국 단위의 농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준비하였다. 우선 농민대회의 공식프로그램에 여의도에서 미 대사관까지의 평화적 시위행진을 포함시켰다. 둘째, 각 단체의 연대투쟁에 대한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참여 규모를 사전에 점검하고, 대회 시 단체별로 대오를 형성하도록 하였다. 셋째, 전국 각 군에 걸쳐 농민이 참여하도록 철저히 준비하고, 각 군마다 농협에 압력을 가해서 필요한 경비를 제공케 하거나 버스를 대절하여 농민을 수송하였으며, 농축산물 제값받기 경북대책위원회, 토지 무상양도 전국대책위원회,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 전국수세폐지 대책위원회 등이 함께 가담하였다. 넷째, 서총련 농민분과, 전국 대학 4H연구회연합회, 수원지구대학생협의회 농민분과, 중부지역 농촌관련 동아리협의회 등으로 ‘전국농민대회를 위한 학생 지원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학생 대표가 대회준비위에 참여하면서 학생들의 조직적인 지원활동이 이루어졌다.

1988년 11월 17일 여의도 광장에서 대회가 진행되었다. 각 생산자단체와 수세 폐지대책위원회, 의료보험대책위원회, 농산물 제값받기 경북대책위원회의 입장 발표가 있은 후, 각 정당에서 농업문제에 대한 공식정책을 밝히는 순서가 있었으나, 민정당은 불참하였고 세 야당 역시 농민들의 거센 야유와 비난만 받고 말았다. 대회가 끝난 후 고추생산비보장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한 농산물 제값 받기 경북농민대책위원회를 선두로 마포대교와 신문로에 이르는 평화적 가두행진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광화문네거리를 100m 남겨놓고 무장 경찰의 저지선으로 행진이 차단되어 연좌농성을 벌이다가 경찰과 치열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약 500여 명의 농민들은 학생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돌과 화염병, 각목 등으로 맞서 싸웠다. 미 대사관으로의 진출이 막히자 농민들은 농협중앙회를 점거하였으며, 당일 새벽부터 고추 수매를 요구하며 농협 점거농성에 들어와 있던 해남·진도 지역의 농민과 함께 약 400여 명이 농성 투쟁을 하였다. 농민들은 자정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농협중앙회장과 간부들을 불러놓고 농협의 반농민적 행태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농협중앙회장으로부터 “농축산물 수입개방 저지와 제값 받기 운동에 농협이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적극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문서와 녹음으로 기록하고 농성을 끝냈다. 해남, 진도의 농민들도 고추 100톤의 추가 수매를 확약받고 농성 사흘째 되던 날 모두 해산했다.

농민운동은 그 후 연합체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1989년 3월 1일 전농협을 확대 개편하여 전국농민연합을 결성하고,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및 제값받기 투쟁을 전개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사료소개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조건으로 총 157 건이 검색되었다. 전국농민단체협의회의 <결성선언문>(등록번호 : 211052)을 비롯하여 전국농민단체협의회준비위원회가 결성식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민통련에 보낸 편지(등록번호: 64691), <전국농민단체협의회 회의요약>(등록번호 : 303297), <농축산물수입저지 및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등록번호 : 208913), <(가칭)전국농민운동(단체)협의회 준비소위원회 제1차 회의 회의록>(등록번호 : 320987),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운영위원회의 <89년도 사업계획(안)>(등록번호 : 177084), 성명서 <소젖 짜고, 돼지밥 주고, 농약 뿌리고, 고추 따는 이 바쁜 농사철에 우리는 왜 서울 힐튼호텔 앞에 모였는가?>(등록번호 : 208888), 기자회견자료 <1989년 11월28일 농축산물 수입저지 및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 개최에 관한 기자회견 보도자료>(등록번호 : 303174)와 사진사료 <'88 전국농민단체협의회 결성대회>(등록번호 : 214471) 등이 있다.

전국농민단체협의회 결성

1987년 6월민주항쟁의 과정을 거치며 각 부문 운동의 통합조직들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경우 개신교와 가톨릭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주적인 군 단위 농민회를 결성하기 시작했고, 이를 토대로 1987년 2월 26일에는 전국농민협회가 결성되었다. 1987년 대선 이후 전면적인 농축산물 수입자유화가 발표되자, 낙농·육우 농민들을 시발로 양계, 포도 농민에 이르기까지 수입개방 저지투쟁을 대규모로 벌였다. 이 투쟁을 통해 생산자단체들이 처음으로 투쟁의 주체로 부각되었다. 이후 농민운동단체들은 이들 생산자단체와의 상층 연대를 통해 1988년 4월 22일 ‘농축산물 수입저지 전국농민대회’ 공동 개최, 5월 26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농축산물 수입반대 전국농민결의대회’등을 개최했다.

이후 한미무역실무회의를 통해 쇠고기, 유제품, 과일류, 담배 등 농축산물 수입이 전면화 됨에 따라 생산 농민들의 위기는 더욱 커지게 되었으며, 작목별 생산자단체들 역시 공동대처를 절박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대정부협상 차원에서 얻어낼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생산자단체 지도부는 그간의 타협적, 기회주의적 성향에서 점차 탈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0월 30일 13개 농민단체들의 범 농민적 협의기구인 전국농민단체협의회(전농협)를 결성했다. 이들은 결성선언문에서 “농민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미국 농축산물 수입개방이 노태우 정권의 등장과 함께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며, 농민의 생존권과 민족의 자립경제를 이룩하기 위해 단체를 결성한다고 밝히고, 토지기본법 개정, 곡가결정과정에 농민 참여 제도화, 농협·축협·수협의 민주화, 농가부채 탕감, 남북한 농민교류 등을 주장했다.

전국농민단체협의회는 출범하자마자 농축산물 수입개방 저지와 제값 받기를 위한 전국 단위의 농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준비하였다. 우선 농민대회의 공식프로그램에 여의도에서 미 대사관까지의 평화적 시위행진을 포함시켰다. 둘째, 각 단체의 연대투쟁에 대한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참여 규모를 사전에 점검하고, 대회 시 단체별로 대오를 형성하도록 하였다. 셋째, 전국 각 군에 걸쳐 농민이 참여하도록 철저히 준비하고, 각 군마다 농협에 압력을 가해서 필요한 경비를 제공케 하거나 버스를 대절하여 농민을 수송하였으며, 농축산물 제값받기 경북대책위원회, 토지 무상양도 전국대책위원회,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 전국수세폐지 대책위원회 등이 함께 가담하였다. 넷째, 서총련 농민분과, 전국 대학 4H연구회연합회, 수원지구대학생협의회 농민분과, 중부지역 농촌관련 동아리협의회 등으로 ‘전국농민대회를 위한 학생 지원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학생 대표가 대회준비위에 참여하면서 학생들의 조직적인 지원활동이 이루어졌다.

1988년 11월 17일 여의도 광장에서 대회가 진행되었다. 각 생산자단체와 수세 폐지대책위원회, 의료보험대책위원회, 농산물 제값받기 경북대책위원회의 입장 발표가 있은 후, 각 정당에서 농업문제에 대한 공식정책을 밝히는 순서가 있었으나, 민정당은 불참하였고 세 야당 역시 농민들의 거센 야유와 비난만 받고 말았다. 대회가 끝난 후 고추생산비보장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한 농산물 제값 받기 경북농민대책위원회를 선두로 마포대교와 신문로에 이르는 평화적 가두행진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광화문네거리를 100m 남겨놓고 무장 경찰의 저지선으로 행진이 차단되어 연좌농성을 벌이다가 경찰과 치열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약 500여 명의 농민들은 학생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돌과 화염병, 각목 등으로 맞서 싸웠다. 미 대사관으로의 진출이 막히자 농민들은 농협중앙회를 점거하였으며, 당일 새벽부터 고추 수매를 요구하며 농협 점거농성에 들어와 있던 해남·진도 지역의 농민과 함께 약 400여 명이 농성 투쟁을 하였다. 농민들은 자정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농협중앙회장과 간부들을 불러놓고 농협의 반농민적 행태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농협중앙회장으로부터 “농축산물 수입개방 저지와 제값 받기 운동에 농협이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적극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문서와 녹음으로 기록하고 농성을 끝냈다. 해남, 진도의 농민들도 고추 100톤의 추가 수매를 확약받고 농성 사흘째 되던 날 모두 해산했다.

농민운동은 그 후 연합체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1989년 3월 1일 전농협을 확대 개편하여 전국농민연합을 결성하고,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및 제값받기 투쟁을 전개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사료소개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조건으로 총 157 건이 검색되었다. 전국농민단체협의회의 <결성선언문>(등록번호 : 211052)을 비롯하여 전국농민단체협의회준비위원회가 결성식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민통련에 보낸 편지(등록번호: 64691), <전국농민단체협의회 회의요약>(등록번호 : 303297), <농축산물수입저지 및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등록번호 : 208913), <(가칭)전국농민운동(단체)협의회 준비소위원회 제1차 회의 회의록>(등록번호 : 320987),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운영위원회의 <89년도 사업계획(안)>(등록번호 : 177084), 성명서 <소젖 짜고, 돼지밥 주고, 농약 뿌리고, 고추 따는 이 바쁜 농사철에 우리는 왜 서울 힐튼호텔 앞에 모였는가?>(등록번호 : 208888), 기자회견자료 <1989년 11월28일 농축산물 수입저지 및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 개최에 관한 기자회견 보도자료>(등록번호 : 303174)와 사진사료 <'88 전국농민단체협의회 결성대회>(등록번호 : 21447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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