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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서 성고문 사건

1986년 5.3인천항쟁 이후 민주화운동 진영은 다양한 종류의 대중적 헌법개정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정부는 정권안보 차원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5.3인천항쟁의 배후인물 색출을 명목으로 관련자 구속, 수배, 고문 등을 자행했다.

1985년 봄 서울대 의류학과 제적생 권인숙은 부천의 가스배출기 제조회사에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위장취업을 했다가 1986년 6월 4일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조사과정에서 권인숙의 위장취업이 밝혀졌으나 경찰은 인천5.3항쟁 관련 수배자들에 대한 정보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부천경찰서 경장 문귀동은 권인숙을 수사계 수사실로 데려가 6월 6일과 7일에 걸쳐 추악한 성고문과 공갈, 협박을 가하며 수배자 소재에 대한 진술을 강요했다. 6월16일 권인숙의 신병이 교도소로 옮겨졌다. 그동안 권인숙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악몽과 자살충동에 시달렸으나 이와 같은 끔찍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권인숙의 소식이 교도소 내의 재소자들에게 알려지면서 소내 70여 명의 양심수가 문귀동의 구속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권인숙도 6월 28일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권인숙은 면회를 통해 성고문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7월 3일, 문귀동을 강제추행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했다. 5일에는 권인숙의 변호인단 9명이 문귀동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 6명을 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했고 문귀동은 이에 맞서 명예훼손 및 무고혐의로 맞고소했다. 권인숙과 변호인단은 진실을 밝히는데 온 힘을 다했다. 이들은 여러 차례의 접견을 통하여 사건의 실체를 낱낱이 기록한 고발장을 작성해 제출하고 학원, 노동계, 인권단체 등에 배포함으로써 이를 세상에 알렸다. 이에 검찰과 공안당국은 공식발표를 통해 성고문 사실을 부정하고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도구화하고 있다”고 날조했다. 그들은 보도지침을 통하여 사건의 진실을 은폐, 왜곡했다. ‘부천서 성고문’을 부천서사건’으로 쓸 것을 요구했고 언론은 이에 충실히 따랐다.

7월 1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 신민당, 여성단체들은 ‘성고문·용공조작 폭로 규탄대회’를 개최했고 개신교와 천주교에서는 ‘성고문규탄대회’, ‘성고문폭로 특별미사’를 개최하는 등 진상규명과 공정수사를 촉구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그러나 외압에 의해 사건은 축소은폐 되어 문귀동은 기소유예, 옥봉환 경찰서장 등 등 관련경찰 5명에게는 무혐의 결정이 내려졌다. 9월 1일 166명의 권인숙 변호인단은 문귀동의 기소유예 결정 등에 대해 재정신청을 냈으나 기각되자 특별항고를 통해 법적인 노력을 다했다. 변호인단의 중심역할은 조영래 변호사가 맡아 혼신의 힘을 다했다. 사건은 2심과 3심을 거쳐 1987년 6월에 종결되었다. 권인숙은 위장취업 혐의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중 1987년 6월항쟁 이후 가석방되었다. 이후 한참 뒤인 1989년 2월 9일 마침내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져 문귀동은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또 권인숙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도 받았다. 문귀동은 1993년 만기 출소했다.

이 사건은 진실확인 과정에서 공권력의 횡포와 부도덕성, 인권탄압의 실상을 폭로하여 제5공화국의 종말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고 재야, 정치권, 종교계 등이 연합하여 공동대처하는 과정에서 민주세력의 연대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주요출처 :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 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보고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부천서 성고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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