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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사건

1991년 4월 26일 학원자주화투쟁에 참여한 명지대 경제학과 1학년생 강경대가 백골단 소속 사복경찰에게 쇠파이프로 구타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4월 24일 상명여대의 학원자주화 집회에서 지지 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명지대 총학생회장 박광철이 불법으로 연행되자, 명지대 학생들은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26일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 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에 동료 학생 300여 명과 함께 참석한 강경대는 경찰과 대치하던 중 시위자를 검거하기 위해 교내로 진입한 사복체포조인 ‘백골단’을 피해 정문 옆 허물어진 담장을 넘으려다 경찰에 붙잡혀서 그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집단 구타당하였다. 학생 100여 명이 화염병을 던지며 몰려가자 백골단은 강경대를 놓아두고 달아났다.

강경대는 인근 성가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강경대를 검진한 성가병원 박동국 외과 과장은 숨진 강경대의 오른쪽 눈썹 위가 둔기로 맞은 듯 사선 방향으로 7cm가량 찢어졌고 두개골 일부가 함몰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오후 6시쯤 강경대의 시체를 연세대 부속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다. 강경대의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은 출입이 통제되었고, 명지대생과 서총련 소속 학생 등 2,000여 명이 영안실 주변과 연세대 정문 등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4월 27일 연세대에서 규탄대회가 열린 것을 비롯하여 부산, 광주 등 전국 20개 대학에서 강경대의 폭행치사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잇따랐다. 이에 서울지검은 경찰로부터 27일 이형용 일경, 김영순 상경 등 전경 4명의 신병을 넘겨받고, 이들 외에 같은 소대 소속 김형두 상경이 강경대 구타에 가담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어 28일 오후 이형용과 김영순 등의 구속영장을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아 구속을 집행했다. 4월 29일 오후 6시 연세대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폭력살인정권 규탄 범국민결의대회’가 열린 것을 비롯하여 전국 60여 개 대학에서 규탄집회가 열렸다. 범국민결의대회 참석자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대국민 공개 사과와 내각 총사퇴, 이종국 치안본부장 등의 책임 경찰 간부 구속을 요구했다.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경찰의 저지를 뚫고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일부 학생들은 시내 곳곳에서 폭력 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같은 날 ‘강경대 치사사건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치루던 전남대생 박승희가 분신하여 5월 19일 사망했다. 국민연합·전대협·신민당 등 44개 단체와 정당으로 구성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는 5월 4일까지 강군 추모 기간 중 각종 규탄대회와 추모행사를 열기로 하였다.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는 5월 2일 발표한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 “현 상태에 대한 본질을 직시하지 못한 채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며, “노 대통령이 진정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진다면 국민에게 공개 사과하고, 공안내각 총사퇴와 내무부장관 등 관련자 5명 구속, 백골단 해체 등 3개의 요구사항에 대해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백골단과 전투경찰의 살인적 폭력에 대한 범국민적인 분노를 모아 백골단을 해체시키고 현 정권의 퇴진을 위해 각계각층과 공동투쟁해가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1991년 5월 4일 오후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백골단 전경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이날 강경대 구타치사에 항의하는 가두시위에는 전국 21개 도시에서 수 만여 명이 참가하여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5월 8일에는 여성단체연합이 명동성당 앞에서 ‘백골단·전투경찰 해체 및 폭력정권 규탄 여성대회’를 개최하였다.

5·18광주민중항쟁 11주년인 5월 18일 ‘노태우 정권 퇴진 제2차 국민대회’(고 강경대 열사 장례식)가 거행되고, 서울과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5·18 추모집회와 함께 강경대 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가두시위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강경대의 장례 행렬은 신촌로타리에서 시청 앞 노제를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하여 4시간 이상 대치한 끝에 이날 저녁 마포구 공덕동 로타리로 장소를 바꿔 노제를 치른 뒤 사망 23일 만에 장지인 광주로 행했다. 광주에 도착한 장례 행렬은 16시간이나 경찰과 대치한 끝에 자정을 넘긴 심야에 노제를 치렀다. 운구차가 도착한 금남로 3가 일대는 학생들과 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0만여 명의 인파로 메워졌으며,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의 강제 해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연세대 앞 철길에서 이정순 분신 사망,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 분신 사망, 광주 운전기사 차태권 분신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전국을 한 달 남짓 태풍으로 몰아치게 했던 강경대 사망사건은 91년 5월투쟁(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의원 외유사건, 수서비리사건(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 페놀사건, 물가고 등의 악재로 10% 미만의 지지율을 기록하던 민자당이 기초의회 의원선거로 겨우 숨을 돌리던 차에 일어나 노태우 정권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게 하였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전재호·김원·김정한 저, 『91년 5월투쟁과 한국의 민주주의』 91년 5월투쟁 청년모임 편,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991년 5월』 강준만 저,『한국현대사 산책-1990년대 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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