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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농민시위

농민들은 1987년의 고추값 폭락과 수세제도의 불합리성 및 농지개량조합의 비민주적 운영에 항의하여 본격적인 대중투쟁으로서 수세투쟁과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을 전개했다. 1988년 11월 1일 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 등을 꾸리고 수세폐지와 고추전량 수매를 위한 투쟁을 전국 각지에서 400여 차례나 전개하였다. 1988년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여소야대 상황에서 추곡수매가 국회동의제가 실시되었고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이러한 문제점은 시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추값은 나날이 폭락하였다. 정부의 저곡가정책에 분노한 농민들은 국회 개원 시기에 맞춰 자신들의 절박한 생존문제를 대대적으로 알리기 위해 여의도광장에서 농민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1989년 2월 13일 전국 99개 군 농민 15,000여 명은 여의도광장에 모여 ‘수세폐지 및 고추전량수매 쟁취 전국대회’를 열었다. 집회를 끝마치고 4당 대표와 대책을 토론하기 위해 국회의사당 쪽으로 행진했다. 그러나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분노한 농민들은 만장이나 깃발을 달기 위해 가져 온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이에 대항하면서, KBS·정부 업무수행 차량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정부는 농민운동 지도자와 전민련 의장 및 전대협 의장 등 민족민주운동 세력에 대한 검거령을 내리는 한편 전국에서 총 458명이 연행되어 117명이 입건되고 6명이 구속되고 9명이 불구속되었다. 농민들은 2월 25일 ‘여의도 농민집회 폭력진압 규탄과 수세 완전폐지를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26개 군에서 동시에 개최하면서 투쟁하였으나, 정권의 대대적 탄압은 농민운동을 크게 위축시켰으며 가톨릭농민회(가농) 등은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정부당국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농민문제의 심각성을 일반국민들이 공감하게 되었으며 수세인하의 성과도 이루었다.

흔히 ‘죽창시위’로 불리는 여의도 농민 시위는 1960·1970년대 개발독재의 그늘 아래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1980년대 들어서는 농축산물 수입개방 조치에 의해 벼랑으로 내몰린 농민들의 저항이었다. 또한 이 투쟁은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기농) 등 기존의 전국적 농민운동조직과 1980년대 하반기부터 광범위하게 결성되기 시작한 자주적 농민 대중조직의 일부가 연합하여 1989년 3월 1일 전국농민운동연합(전농. 의장 윤정석, 부의장 정광훈)을 발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한국가톨릭농민회 편, 『한국가톨릭농민회 30년사』

여의도 농민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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