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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부지역노동자동맹(남노련)사건

치안본부는 1987년 1월 15일 김영진·김덕형·황정옥 등 10명을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약칭 노해사. 의장 김영진) 구성혐의로 연행하고 2월 3일 이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2월 26일의 발표에 의하면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 사건 피의자들은 용공 지하단체인 노해사를 결성한 뒤 노동야학교실을 개설하여 근로자들을 의식화시키는 등의 활동을 했으며, 중앙지도위원회 산하에 교육부를 두어 한광야학 등 3개 야학교실을 운영하고 조직부와 투쟁부 산하에는 각 지역별 책임자를 두어 근로자를 사상무장 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고 밝혔다.

한편 4월 26일 서울남부지역노동자연맹(약칭 남노련, 또는 남부노동자연맹) 각 지부의 대표자 10여 명이 도봉산에서 향후 조직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회의하던 중 일거에 검거되었다. 5월 1일 치안본부는 ‘지하 혁명조직 남노련 사건’에 대해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남노련은 중앙위원회 산하에 조직, 교육, 선전, 투쟁 부서를 갖춘 지하 혁명조직이었으며 별도로 자료책을 거느리고 있었다. 치안본부는 위원장 유용화(28, 고려대 사학과 졸) 등 13명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북한 고무 찬양, 이적 출판물 제작·소지·유포 혐의로 구속하고, 자금을 제공한 김사경(한국유리 직원) 등 관련자 30명을 수배했다. 이후 1987년 11월 최규엽(33, 고려대 독문과), 이재형 등 4명이 연행되어 2명이 구속되었고, 1988년 5월에는 조석현(30, 고려대 법학과 졸)이 구속되는 등 사건은 1년 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런데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 사건 의장으로 구속된 김영진은 그 후 남노련사건으로 공소사실이 변경되었고, 노해사 의장에서 남노련 중앙위원으로 바뀌었다. 남노련 위원장으로 구속되었던 유용화도 그해 11월 최규엽이 구속되자 최규엽이 중앙위원장으로, 유용화는 중앙위원으로 바뀌었다. 송파구 소재 국군보안사령부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가혹한 고문과 용공조작, 검찰과 사법부의 협력의 과정을 통해 지하혁명조직으로 탈바꿈된 사건이 완성되었다.

남노련은 1985년 8월 결성된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 상세는 별항 ‘서울노동운동연합 사건’ 참고)에 참여하지 않고 대중적인 노조결성을 노동운동의 당면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한 이들을 중심으로 구로와 영등포 지역의 임금투쟁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노동운동에 뜻을 둔 사람들에 대한 교육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를 만들고 노동자대중을 위한 신문인「선봉」에 이어 「횃불」을 발행하고 1986년 10월에는 ‘민주헌법쟁취 노동자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공개적인 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남노련 사건은 1987년을 전후한 시기에 노동자 대중이 한국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노련사건은 1988년 10월 3일 유용화 등이 석방되었고, 2년여 간 수배되었던 남노련 중앙위원 김숙의 수배가 해제됨으로써 마무리되었는데, 남노련 사건은 내부 프락치사건으로 관련자들이 검거되어 활동 자체가 마비되는 후유증을 안기기도 했다.

서울남부지역노동자동맹(남노련)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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