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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서명운동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됨으로써 본격화된 개헌논의에 위협을 느낀 전두환 대통령은 1986년 1월 16일 국정연설을 통해 88올림픽 개최를 핑계로 개헌 논의에 대한 유보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신민당 및 민추협 등 야당계는 즉각적으로 반발하며 1986년 2월 12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 1,000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민주화운동 진영은 3월 8일 헌법개정추진위원회 서울시지부 현판식을 필두로 부산과 광주에서 열린 개헌촉구집회에 20여만명이 참여하는 등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본격적인 장외투쟁에 돌입했다. 3월 9일 김수환 추기경의 직선제 개헌 촉구를 시발로, 3월 11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4월 4일 성공회 소속 신부들, 5월 9일 대한조계종 불교 승려들의 시국선언문 발표 등 종교계에서 가히 종파를 초월하여 서명운동에 동참하였다. 여성계는 3월 13일 ‘민주헌법 쟁취 범여성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4월 3일에 발족식을 가졌다. 학계 또한 3월 28일 고려대 교수 28명의 시국 선언문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도화선이 되어 6월 2일 23개 대학의 교수 265명이 연합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앞서 5월 3일 인천에서 열린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경기지부 결성대회에는 학생과 노동자 등 5천여명이 집결해 경찰과 충돌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국회에 개헌특위를 설치하고 정권연장의 꼼수로 내각제 개헌안을 들고 나오는 한편, 민주진영에 대한 전면적 탄압을 시도하였다. 정부는 1986년 하반기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 및 구속으로 일관하면서 제헌의회그룹사건, 『말』지 기자 기소 사건, 서울대 대자보 사건,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 사건, 마르크스·레닌주의 당 사건,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식 및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반제구국노동자동맹당 사건 등 한달 평균 1건 가량의 용공조작 혐의의 조직 사건을 양산해냈다. 한편 개헌특위의 논의가 공전되면서 당시 신민당 총재이던 이민우가 일정 수준의 민주화 조치를 조건으로 한 내각제 합의를 내용으로 한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내비치자 이에 대해 김대중·김영삼 등이 반발하여 신민당을 탈당하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고, 전두환은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현행헌법으로 정부를 이양한다”는 이른바 ‘4.13호헌조치’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맞물려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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