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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사건(오원춘사건)

1970년대 후반 한국경제는 전반적인 인플레, 임금상승, 농산물 가격 파동 등을 겪으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개발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 저농산물가격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국가의 정책목표인 저농산물가격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행정기관의 강제적인 정책집행이 빈번했고, 이 과정에서 국가 말단 행정기관과 농민들의 충돌이 잦았다. 국가 말단 행정기관, 농협 등은 농업 현실, 농촌의 삶의 주체인 농민들의 의사는 무시한 채 강압적으로 신품종 보급, 새마을사업, 영농독려, 농협 출자 강요 등을 실시함으로써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일명 오원춘 사건)도 정부의 소득증대 사업에 따른 신품종 보급에서 출발하였다. 1978년 가을 경북 영양군은 농민들에게 가을 감자를 심어 소득증대를 권장하며 “시마바라”라는 감자 씨앗을 권장하였다. 농민들이 받아 심은 감자씨앗에서는 거의 싹이 트지 않았다. 농민들은 감자를 심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에 분노하여 피해보상을 요구하였다. 가톨릭농민회 청기 분회장으로 농민운동을 지도하던 오원춘은 ‘청기면감자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당국의 갖은 공갈과 협박,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안동교구 사제들과 협력하여 34농가의 피해보상을 받아냈다. 이후 오원춘은 지방 농정 당국으로부터 ‘골치아픈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1979년 5월 5일 감자 피해보상 활동에 앞장섰던 청기 분회장 오원춘이 신원을 알 수 없는 2명에게 납치되어 울릉도에 감금되었다가 5월 19일 집으로 돌아왔다. 납치사실을 교회에 보고하기까지 상당한 위협을 느꼈던 오원춘은 6월 13일 농민운동을 위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양심선언을 하였다. 이에 안동교구는 7월 17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하여 이 사건을 전국에 폭로하게 되었고 오원춘 사건에 대한 경찰의 답변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서 경북도경은 안동교구가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농민운동 탄압이라는 왜곡된 성명서를 배포했다는 혐의로 신부 및 농민회 간부를 구속하였다. 대통령의 특별조사령, 농민회와 교회에 대한 용공 시비가 일면서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8월 6일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신부 120명 신자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기도회를 열고, 사제단과 가농회원 80여 명이 20일간 항의농성을 벌이는 한편, 8일간의 단식기도, 가두 촛불시위, 공정 재판 요구 및 집단 방청 활동 등을 전개하였고, 명동성당 기도회에는 전국 14개 교구 700여 명의 사제들이 참석하였다. 각 교구에서도 수많은 기도회에 수만 명이 참여하는 등 군부독재 정권과 천주교회의 대결구도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면전의 양상을 띠었다. 10월 14일 천주교 안동교구 사제단은 「오원춘 사건 보고서」를 발표하여 경찰 측 발표는 사실과 다르며, 재판 과정에서 경찰의 조작 과정이 폭로되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가톨릭농민회와 교회의 적극적인 농민운동이 정부, 사법부, 언론에 의해서 편파, 왜곡된 사건으로 극히 모순된 유신체제의 상황을 증명하였고 동시에 한 농민의 인권이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또한 농민운동 차원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유신체제의 극심한 억압구조에서도 교회가 일치하여 결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가톨릭과 유신정권의 대립이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요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 『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1970년대 민중운동연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1970년대)보고서Ⅰ』

안동교구가톨릭농민회사건(오원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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