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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모방 노조사수투쟁

1980년 ‘민주화의 봄’ 기간 동안 노동계의 요구도 강렬하게 분출되었다. 노동자들은 1975년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악화된 근로조건을 회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3월부터 시작된 노조결성투쟁은 광주민중항쟁 직전인 5월 17일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불과 두 달 반 동안 조직노동자 수가 8만여 명이나 증가했다. 어용노조 반대투쟁도 격렬하게 일어났으며, 원풍모방, 동일방직, 반도상사 등 1970년대의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조 민주화투쟁이 진행되었다. 5.17계엄확대 이후 노동운동은 또다시 짓밟혔다.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8월에 이른바 ‘노동계 정화조치’를 단행하여 105개의 지역지부를 강제해산시켰다. 조직노동자수는 9월에 14만 명이나 줄었고, 민주노조 활동을 했던 핵심간부들은 노동계 정화대상자 191명에 포함돼 제거됐다. 84명이 계엄사로 끌려가 사표를 강요당했고, 그 중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80년 12월 31일 신군부는 기업별노조로의 전환, 제3자개입금지 등을 골자로 노동관계법을 전면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신설했다. 1981년 1월 신군부는 노동부와 공안기관, 공권력을 동원하여 민주노조 파괴 작전을 진행했다.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청계피복,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서통노조가 차례로 파괴되었다.

마지막으로 70년대 최강의 민주노조 원풍모방이 1982년에 파괴되었다. 원풍모방 노조는 1970년대 민주노조 가운데 에서도 하나의 '전설'로 간주될 만큼 훌륭한 활동을 전개했던 노조였다. 1972년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돼 단체행동이 일체 금지된 상황에서 원풍노조는 소모임 활동가들을 주축으로 10년간의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다.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한 1973년에는 노조를 중심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도산을 막고 1974년에는 노조가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등 한국전쟁 이후 노동조합사에 초유의 사례를 만들며 회사 정상화에 기여했다. 원풍노조의 소모임 활동과 체계적인 교육활동은 강력한 민주노조를 만드는 동력이었다. 원풍모방의 민주노조운동은 JOC(가톨릭노동청년회)·도시산업선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노동자들의 소모임을 기반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당시 노조 내에는 7~8명으로 조직된 소모임 이 50~60개에 이르러 그 안에서 활동하는 조합원이 400~500명에 달했다. 또한 노조에서의 각종 교육훈련 활동과 주로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졌던 파견교육은 노동운동에 대한 시각을 넓혀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원풍모방 노조원들은 1979년 11월 24일에 YWCA에서 개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출 저지 국민대회’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였고, 어용화된 섬유노련 본부에 대항해 유일하게 제 목소리를 내던 산별노조 체계 하의 기업 단위 노조 조직답게 1980년 봄에는 `한국노총 민주화와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전국 궐기대회'를 주도적으로 열기도 했다. 비상계엄 확대와 광주 학살 소식으로 모두 숨을 죽이고 있던 1980년 5월 말, 원풍모방 노조원 1,700명은 광주희생자들을 위해 4백70만원을 모아 6월 초 광주의 윤공희 대주교에게 이를 직접 전달했다. 당시의 공포 분위기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실시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안기부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동원하고 회사의 협조 하에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인 원풍모방에 대한 본격적인 파괴공작에 착수했다. 1980년 7월 16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당시 노조 지부장인 방용석을 연루시켜 수배 조치를 하였고, 상급 노조인 한국노총 섬유노동조합 또한 노동계 정화조치라는 명목으로 원풍모방노조 부지부장인 박순희에 대한 조합원 제명 조치를 내렸다. 12월 8일 합동수사본부는 다시 노조 상무집행위원 19명 전원과 대의원 30여 명을 연행하여 강제 사표를 받았으며 그중 4명은 순화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탄압에도 노조원들의 노조 사수 의지는 확고하였다. 회사 측이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원풍모방노조를 부산소재 원풍타이어노조와 통합시키려는 시도했지만 원풍모방노조는 1982년 3월 15일 임시대의원대회를 통해 조합장으로 정선순을 선출하는 등 조직을 재정비하고 노조활동을 정상화하였다.

1982년 9월 27일 전면적인 노조 와해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날 현장 남성 관리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40여 명의 회사원들이 노조 사무실에 무단으로 진입하여 노조 간부와 조합원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고, 사무실 기물을 파괴했다. 그들은 위원장 정선순을 감금하고 17시간에 걸쳐 폭행과 협박을 가하면서 사표를 강요했다. 또한 노조 사무실 점거와 노조 간부 폭행에 대한 소식에 곧바로 농성투쟁에 돌입한 650여 명의 조합원들에게 회사는 식당을 봉쇄하고 수돗물을 끊었고, 고향의 가족들을 동원해 농성 해산을 시도했다. 추석을 하루 앞둔 9월 30일 오후 6시경 경찰과 회사가 고용한 폭력배들이 농성 현장에 들이닥쳐 250여 명의 조합원들을 밖으로 끌어냈고, 밤 10시 30분경에는 전경 150여 명이 합세하여 나머지 조합원들에게 폭행을 가하며 해산시켰다. 10월 1일 새벽 4시, 정문 안쪽에서 연좌농성을 하던 마지막 농성 노조원 50여 명도 수백 명의 전투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9월 27일 사태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조합간부 8명이 구속되고, 55명이 구류선고를 받아 39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농성과정에서 약 2백 명 이상이 병원에 입원했으며 5백 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강제해고를 당했다.

이후 10월 7일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관에서 개최 예정이던 기도회조차 경찰의 원천봉쇄 조치로 무산되고 말았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수배 상태에서도 유인물 배포나 항의회 조직 등 투쟁을 계속하였고, 결국 1982년 12월 10일 인명진 목사가 산업선교회관에서의 철수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983년 1월 19일 1백여 명의 조합원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해산을 결정함으로써 노동조합을 되찾기 위한 투쟁은 종결되었다. 원풍노조 조합원들은 1983년 9월 원풍모방노조해고복직투쟁위원회를 만들고 활동을 계속했다. 2000년 이후 원풍모방 노조투쟁은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었고, 현재까지 복직수용을 거부하는 회사 측에 맞서 복직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유시춘 외, 『70·80 실록 민주화운동Ⅰ- 우리 강물이 되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보고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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