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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농성사건

6.10국민대회가 6월민주항쟁으로 진전되는 데는 명동성당 농성과 명동 일대에서의 넥타이부대 시위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명동성당 앞마당에서는 6월 10일 오후 4시 반경에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와 이곳에서 천막생활을 하던 상계동 철거민들이 국민대회에 앞서 자체 집회를 가졌고, 경찰에 밀린 300여 명이 경찰의 차단으로 갇힌 상태에서 이곳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저녁 땐 시민들과 신자 및 수녀들이 합세해 9시경까지 시민토론회 등을 열었다. 밤 10시 이후 퇴계로 쪽에서 밀린 학생들이 몰려와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11일 시위대가 레이건과 전두환, 노태우의 허수아비를 바리케이드 앞에서 화형시켰는데, 이에 자극을 받은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밀고 들어갔고 농성자들이 화염병과 돌로 맞서는 바람에 경찰이 물러나는 일진일퇴의 과정에서 명동일대는 최루가스로 자욱하게 되어 행인들은 눈을 뜰 수 없고 상인들은 절반이 철시했다. 명동사태가 비화하면서 명동성당은 이제 태풍의 눈이 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우려하는 입장도 있었지만 서울대, 경희대, 외국어대, 시립대 등 7개 대학의 학생들이 명동농성 학우 구출투쟁 출정식을 갖고 명동 도심지로 나왔다. 오후 5시경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남대문시장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사태가 커지자 명동성당 김병도 주임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의 재가를 얻어 50여 명의 수도권 사제를 명동성당으로 불러 철야농성을 결의하고 시위대가 안전 귀가할 때까지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12일 새벽 4시에 비상소집된 서울교구 사제단회의는 학생들의 민주화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이들과 동참하며 이들을 보호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정부는 서울시경을 통해 농성사건을 좌경운동권의 핵심세력인 극렬 불순분자들에 의한 ‘명동성당 집단 난동사태’로 규정했다. 12일 오전 일반 시민들인 ‘넥타이부대’가 명동일대를 뒤덮었다.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가 명동을 축제분위기로 뒤바꾼 것이다. 성당 주변에서는 1만여 명이 모여 대규모 시국토론회를 벌이기도 하였다. 12일 자정 무렵 고위당정회의가 열렸고, 비상계엄선포와 경찰진입을 할지 모른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13일 새벽 1시경 함세웅 신부가 사제단이 앞장서서 경찰진입을 막을 것이라고 농성자들에게 천명하기도 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계속된 명동성당 농성투쟁과 넥타이부대를 주력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는 6.10국민대회를 6월민주항쟁으로 진전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정해구 김혜진 정상호 저, 『6월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편, 『6월항쟁을 기록하다』

명동성당 농성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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