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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18 고려대생 시위 및 피습사건

1) 1948년의 정부수립 이래로 이승만 정부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보다는 친미와 반공을 앞세우면서 반민족 친일행위에 대한 단죄를 목적으로 1948년 10월에 발족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고,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부패특권 세력에 부를 편중시킨 반민주주의 독재 정권으로,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종신집권을 꾀한 ‘사사오입개헌’을 자행하고 정적제거를 위해 ‘진보당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 처형 및 언론자유를 정면에서 말살한 경향신문 폐간 등 끝없는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갖고 1960년에 일어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한다. 4·19혁명은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당일의 3·15마산 시위, 그리고 4·18 고려대생 시위에 이어 절정에 이른 4월 19일의 대규모시위와 4·25 대학교수단 시위로 전개되었다.

2) 제2차 마산의거 발발일인 1960년 4월 11일 마산에서 다시 대규모 시위가 터지자 고려대 간부 학생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신입생 환영회 예정일인 1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선언문, 격문 등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그러나 16일, 낌새를 챈 형사들이 학교로 들이닥쳤고 학교 측은 신입생 환영회를 무기한 연기시켰다. 이에 따라 시위 계획도 연기되었다. 18일 아침 이들은 학교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점심시간 사이렌을 신호로 학생들을 교정에 있는 인촌 동상 앞으로 모이게 하고자 했으나 학생들의 동태를 알아챈 학교 측은 사이렌을 울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은“인촌 동상 앞으로”라고 외치며 순식간에 3,000여 명이 교정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고대신보] 박찬세 편집국장이 기초한 선언문을 박수로 채택하였다. 오후 1시 20분, 고려대 3,000여 명은 스크럼을 짜고“민주 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는 플래카드를 선두로 교문을 나와 태평로에 있는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달렸다. 그들은 선언문에서 ①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②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③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을 배격한다 ④ 경찰의 학원 출입을 엄금하라 ⑤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 말라 등을 주장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제지로 일시 흩어졌다가 1,000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 다시 집결하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연행 학생 석방과“대통령이나 내무부장관이 직접 나와 부정선거를 해명하라”고 요구하며 ① 행정부는 대학의 자유를 보장하라 ② 행정부는 더 이상 민족의 체면을 망치지 말고 무능정치, 부패정치, 야만정치, 독재정치, 몽둥이 정치, 살인정치를 집어치워라 ③ 행정부는 명실상부한 민주정치를 실현하라 ④행정부는 이 이상 우리나라를 세계적 후진국가로 만들지 말라 등 4개항의 대정부 건의문을 결의하였다. 오후 4시 유진오 고려대 총장이 학생들에게 해산을 종용했으나, 학생들은 연행된 동료가 석방될 때까지 해산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연행 학생들은 오후 6시경 내무부장관 홍진기의 특별 지시로 석방되었다. 학생들은 유진오 총장과 고려대 출신의 이철승 의원의 설득을 받아들여 오후 6시 40분 자진해서 연좌데모를 풀고 경찰 차량의 선도를 따라 귀교길에 올랐다. 행렬이 을지로 4가에 다다르자 선두의 경찰 차량은 청계천 4가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오후 7시 20분경 행렬이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도로 옆 골목 안에서 괴한들이 뛰어나와 행렬을 습격하였다. 100여 명의 괴한들은 쇠망치, 몽둥이, 벽돌 등 흉기로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때리기 시작하였다. 선두에 있던 학생 수십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10분도 채 안된 사이에 학생 200여 명이 쓰러졌다. 중상자 20여 명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학생들은 학교로 향해 8시 40분경 해산하였다. 괴한들은 반공청년단 종로구단 동대문 특별단부 소속 조직폭력배들이었다. 반공청년단 종로구단장 임화수는 이날 낮 고려대생이 데모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단원들 300여 명을 중앙청 옆 반공회관에 집결시켰다. 폭력배들은 천일백화점 부근에 대기하고 있다가 귀교길의 학생들을 습격하여 십수 명의 학생을 쓰러트렸고, 그 다음 날 조간신문에 그 장면이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되었다.

3) 4월 항쟁에서 신문은 사태 진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동대문 경찰서는 이튿날 폭력배 8명을 연행하였으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의 지시로 이들을 곧 석방하였다. 이 사건을 주도한 임화수 등 폭력배들은 1961년 8월 25일 혁명재판소에서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받았다.

주요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김정남 저,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4월혁명사료총집발간위원회 편,『4월혁명 사료총집』 1책 일지편

사료소개

4.18 시위를 기념하여 후일 행해진 각종 행사와 관련된 사료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33주년 4.18자료집인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민중정치 실현을 위한 대장정>(등록번호 : 5456), 고려대총학생회의<‘97 4.18민중해방대장정 토론자료집-불복종의 역사를 오늘에 이어>(등록번호 : 15732), <4.18특집신문-민중과 함께 민족고대는 싸우고 있다> (등록번호 : 117487) 등 고려대학교 학생회가 4.18을 맞아 생산한 문건들이 많다.

4ㆍ18 고려대생 시위 및 피습사건

1) 1948년의 정부수립 이래로 이승만 정부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보다는 친미와 반공을 앞세우면서 반민족 친일행위에 대한 단죄를 목적으로 1948년 10월에 발족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고,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부패특권 세력에 부를 편중시킨 반민주주의 독재 정권으로,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종신집권을 꾀한 ‘사사오입개헌’을 자행하고 정적제거를 위해 ‘진보당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 처형 및 언론자유를 정면에서 말살한 경향신문 폐간 등 끝없는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갖고 1960년에 일어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한다. 4·19혁명은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당일의 3·15마산 시위, 그리고 4·18 고려대생 시위에 이어 절정에 이른 4월 19일의 대규모시위와 4·25 대학교수단 시위로 전개되었다.

2) 제2차 마산의거 발발일인 1960년 4월 11일 마산에서 다시 대규모 시위가 터지자 고려대 간부 학생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신입생 환영회 예정일인 1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선언문, 격문 등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그러나 16일, 낌새를 챈 형사들이 학교로 들이닥쳤고 학교 측은 신입생 환영회를 무기한 연기시켰다. 이에 따라 시위 계획도 연기되었다. 18일 아침 이들은 학교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점심시간 사이렌을 신호로 학생들을 교정에 있는 인촌 동상 앞으로 모이게 하고자 했으나 학생들의 동태를 알아챈 학교 측은 사이렌을 울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은“인촌 동상 앞으로”라고 외치며 순식간에 3,000여 명이 교정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고대신보] 박찬세 편집국장이 기초한 선언문을 박수로 채택하였다. 오후 1시 20분, 고려대 3,000여 명은 스크럼을 짜고“민주 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는 플래카드를 선두로 교문을 나와 태평로에 있는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달렸다. 그들은 선언문에서 ①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②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③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을 배격한다 ④ 경찰의 학원 출입을 엄금하라 ⑤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 말라 등을 주장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제지로 일시 흩어졌다가 1,000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 다시 집결하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연행 학생 석방과“대통령이나 내무부장관이 직접 나와 부정선거를 해명하라”고 요구하며 ① 행정부는 대학의 자유를 보장하라 ② 행정부는 더 이상 민족의 체면을 망치지 말고 무능정치, 부패정치, 야만정치, 독재정치, 몽둥이 정치, 살인정치를 집어치워라 ③ 행정부는 명실상부한 민주정치를 실현하라 ④행정부는 이 이상 우리나라를 세계적 후진국가로 만들지 말라 등 4개항의 대정부 건의문을 결의하였다. 오후 4시 유진오 고려대 총장이 학생들에게 해산을 종용했으나, 학생들은 연행된 동료가 석방될 때까지 해산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연행 학생들은 오후 6시경 내무부장관 홍진기의 특별 지시로 석방되었다. 학생들은 유진오 총장과 고려대 출신의 이철승 의원의 설득을 받아들여 오후 6시 40분 자진해서 연좌데모를 풀고 경찰 차량의 선도를 따라 귀교길에 올랐다. 행렬이 을지로 4가에 다다르자 선두의 경찰 차량은 청계천 4가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오후 7시 20분경 행렬이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도로 옆 골목 안에서 괴한들이 뛰어나와 행렬을 습격하였다. 100여 명의 괴한들은 쇠망치, 몽둥이, 벽돌 등 흉기로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때리기 시작하였다. 선두에 있던 학생 수십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10분도 채 안된 사이에 학생 200여 명이 쓰러졌다. 중상자 20여 명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학생들은 학교로 향해 8시 40분경 해산하였다. 괴한들은 반공청년단 종로구단 동대문 특별단부 소속 조직폭력배들이었다. 반공청년단 종로구단장 임화수는 이날 낮 고려대생이 데모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단원들 300여 명을 중앙청 옆 반공회관에 집결시켰다. 폭력배들은 천일백화점 부근에 대기하고 있다가 귀교길의 학생들을 습격하여 십수 명의 학생을 쓰러트렸고, 그 다음 날 조간신문에 그 장면이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되었다.

3) 4월 항쟁에서 신문은 사태 진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동대문 경찰서는 이튿날 폭력배 8명을 연행하였으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의 지시로 이들을 곧 석방하였다. 이 사건을 주도한 임화수 등 폭력배들은 1961년 8월 25일 혁명재판소에서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받았다.

주요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김정남 저,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4월혁명사료총집발간위원회 편,『4월혁명 사료총집』 1책 일지편

사료소개

4.18 시위를 기념하여 후일 행해진 각종 행사와 관련된 사료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33주년 4.18자료집인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민중정치 실현을 위한 대장정>(등록번호 : 5456), 고려대총학생회의<‘97 4.18민중해방대장정 토론자료집-불복종의 역사를 오늘에 이어>(등록번호 : 15732), <4.18특집신문-민중과 함께 민족고대는 싸우고 있다> (등록번호 : 117487) 등 고려대학교 학생회가 4.18을 맞아 생산한 문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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