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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롤데이타 노동쟁의

1980년 봄, 혼미한 안개정국과 경제위기 상황을 뚫고 대학생들의 민주화투쟁시위가 거세지는 가운데 1979년 10.26 사태 이후 침묵을 지키던 노동자들도 투쟁에 나섰다. 노동조합결성 투쟁, 임금인상 투쟁, 노동조건개선 투쟁, 체불임금 청산, 휴폐업반대, 해고반대 투쟁,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 등의 양상으로 1970년대 내내 잠재되어 있던 축적된 역량이 표출되었다. 1980년 5월말 출범한 국보위는 노동조합운동을 전면 금지시키고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한국콘트롤데이타는 미국 다국적기업의 자회사로 1967년 한국에 들어온 이후 급성장했다. 이 회사에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은 1973년 12월 20일이었다. 콘트롤데이타 노동조합은 ‘외국인투자기업 노동조합 및 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과 유신체제의 억압적인 상황 하에서도 조직력을 강화하여 노조민주화투쟁에 앞장섬으로써 대표적인 민주노조로 알려져 있었다. 19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자 노동계탄압정책으로 191명의 노조 간부를 정화대상자로 지목했다. 계엄하에서 진행된 노동계정화조치에 의해 9월 18일 콘트롤데이타 노동조합 이영순 지부장과 유옥순 부지부장은 강제로 간부직에서 물러나 조합원으로 현장근무를 하게 되었다. 콘트롤데이타 노동조합은 이에 항의하다가 집행부를 정비하고 단체협약 갱신을 위한 노사협의에 착수했다. 노사협의의 주요 쟁점은 종업원의 징계, 감원, 해고에 관한 사항이었다. 노사협의는 13차례나 진행되었지만 회사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공전을 거듭하다가 1982년 1월 30일 회사측이 돌연 노동쟁의 발생신고를 하면서 긴장은 고조되었다.

노조가 노동쟁의를 결의한 후 철야농성, 태업 등으로 대응하여 생산량을 25% 감소시키자 회사측은 3월 12일 이영순 전 지부장등 노조간부 6명을 해고했다. 노조는 3월 14일 긴급 임시운영회의를 열고 ①부당 해고 즉시 철회 ②노동쟁의 신고와 남자 관리자의 임금 10% 우선 지급 등 시행착오를 중지하고 근로조건 개선에 임할 것, ③조합원이 대동단결하여 모든 것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할 것 등을 결의하고 3월 15일부터 철야농성과 정상근무를 반복하면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미국 본사 간부들이 한국을 방문해 노조와 협상을 벌였으나 복직문제와 임금인상문제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대기 중이던 120명의 조합원들이 회의장으로 몰려갔고 그 중 40여 명이 농성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부사장 휠러가 미국 본사에 전화를 해 “노동자들에게 감금당했으니 구출해달라”고 했다. 이 내용은 미대사관, 외무부, 내무부, 치안본부 등으로 알려져 전투경찰 200여 명이 투입되었고 조합원 49명이 강제 연행되어 25시간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은 후 모두 풀려났다. 당국은 콘트롤데이타노조를 도시산업선교회와 연계시키고자 했고 언론을 동원하여 이념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이후 회사 철수 소문과 함께 회사측은 생산량을 줄이기 시작했고 조합원들은 노동부에 ‘공장철수반대’, ‘노동부는 해고자 복직을 반대하지 말라’는 요구를 하며 노동부 장관의 면담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전투경찰과 사복형사에 의해 강제 연행되었고 회사는 결국 7월 20일 공장 철수를 선언했다. 이유는 ‘급속한 컴퓨터 기술의 변화에 따른 수익성 감소’였다. 철수 소식이 알려지자 노동자들과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관제언론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언론기관들은 도산한 기업들은 대부분 도시산업선교회가 노동자들을 의식화시켜 노동자들이 과격한 노동운동을 벌인 때문이라고 몰아부쳤다. 당시 언론은 ‘도산(都産)은 도산(倒産)을 부른다’라는 말을 유포시키며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정책을 옹호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이원보 저 『한국노동운동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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