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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고구마사건

4H클럽운동이나 모범농촌건설운동은 있었지만 농민이 주체가 된 농민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1970년대까지 거의 없었다. 그 점은 4월혁명기에도 1970년대에도 비슷했다. 다만 1960년대에 학생들이 대규모로 농촌봉사활동에 나서거나 1960년대 후반부터 농민한테 배우자는 농활이 감시나 탄압을 받으면서 계속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농악이 대학에서 붐을 일으키면서 거꾸로 농촌에 파고든 일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함평고구마사건이 발생하였다.

1976년 9월, 농협 전라남도 지부는 건고구마 대신 생고구마를 사들이겠다는 수매 방침을 발표했다. 농민들은 그에 따라 고구마를 썰어 가공하지 않고 수매에 응했다. 그러나 막상 수매시기가 되자 전량 수매를 약속했던 농협이 실제로는 농민들 생산량의 40%만을 수매했다. “걱정 말라”는 농협의 말을 믿었던 농민들은 시장에 내다 팔 기회도 잃었다. 당시의 전체 손해액은 14,000여만 원으로 추산됐지만, 신고액은 가톨릭농민회(가농)회원 중심의 160개 농가 309만 원에 불과했다.

서경원 등 가톨릭농민회원들의 조직적이고 끈질긴 항의와 요구로 마침내 보상의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1978년 4월 24일, 광주 북동 천주교회에서 함평농민회 회원 7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윤공희 주교와 농민회 지도신부단의 공동 집전으로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이 기도회에서 농민들은 함평 고구마 피해 보상과 농민회 탄압 중지, 구속 회원 석방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27일에는 YMCA 인권기도회 참가자들이 단식 현장을 방문하자 정부는 기동경찰을 동원 강제 해산시키고 20명을 연행하였다. 이에 단식 중이던 농민 회원들은 「전국 회원에게 보내는 글」을 발송하여 전국 회원들의 성원을 촉구하였다. 29일 당국이 피해액 309만 원을 보상하고, 강제 연행된 이들을 석방하기로 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단식 농성 중에 연행된 이상국, 조봉훈이 석방되지 않음으로써 단식투쟁은 계속되었다. 5월 1일 전국에서 모인 40여 명의 신부와 개신교 인사, 양심 인사 500여 명이 기도회를 열었다. 이 기도회에서 전국농민인권위원회를 결성하고, 구속 중인 회원 석방과 농민회 탄압 중지를 요구하였다. 다음 날 이상국과 조봉훈이 석방되면서 단식농성을 끝냈다.

하지만 단식 8일 만에 얻어낸 피해 보상금은 피해 농가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줄기차게 피해 보상을 요구해왔던 가농회원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이었다. 1970년대 농민운동은 함평 고구마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농민들은 이 투쟁을 통해 단식 8일 만에 농협을 굴복시키고 고구마 피해에 대해 보상을 받아냈다. 이 투쟁을 계기로 가톨릭농민회가 농민운동의 중심으로 부각되었고 이후 가농은 1990년대까지 농민운동의 견인차로 투쟁을 이끌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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