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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분신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길에서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했다. 재단사로 일하던 이름 없는 청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태우고 스스로 몸에 불을 사르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고 외치며 산화해 갔다. 다음날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어머니 이소선에게 꼭 이루어 줄 것을 부탁하며 “배가 고프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960~1970년대는 저임금을 토대로 한 불균형 성장정책, 재벌 위주의 성장 우선 정책이 국가의 당면과제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 것’이 당시의 노동현실이었다. 이러한 불합리한 노동현실을 개선시켜 나가기 위한 노동운동은 철저히 통제 당하고 있었고 그나마 있었던 노동조합은 어용으로 노동자편에 서지 않았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어려운 생활을 거듭하다 1965년 ‘시다’(견습공)로 평화시장 ‘삼일사’에 입사해, 1966년 ‘통일사’에 미싱사(재봉공)로 전직하고 1967년에는 재단사가 된다. 이 과정에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공장주인에게 착취당하는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의 어려운 생활과 비참한 현실을 대하며 그들을 돕다가 해고를 당하고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다. 전태일은 1969년 6월 근로조건개선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바보회’를 조직하자 위험분자로 몰려 해고당하고 바보회도 와해되었으나 서울시청, 노동청, 신문사 등을 찾아다니며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를 호소하려 했고 1970년 9월 16일에는 ‘삼동친목회’를 조직했다. 그는 다시 해고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조건에 대한 ‘설문지’를 돌려 작성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를 10월 6일 노동청장에게 제출했다. 노동청은 10월 17일 노동조건이 개선되었다고 공식 발표를 했으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태일을 비롯한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11월 13일 1시 30분 경,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평화시장 앞에 모였다. 경찰이 제지하며 해산을 종용하자 전태일은 온 몸에 석유를 붓고 성냥불을 그었다. 동료들이 불을 끄려고 달려들었으나 이미 온 몸이 타버린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쓰러졌다.

전태일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왔다. 사회 각계에 던져진 전태일의 충격은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각성을 급속도로 확산시켰고 경제성장의 그늘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노동조합의 유명무실함과 허점을 고발했다. 노동문제라면 사실보도조차도 기피하던 언론매체에서 노동문제를 다룬 기사와 보도를 쏟아냈다. 학생들은 노동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추도식과 시위를 벌여 나갔고 종교계는 추도예배로 전태일을 추도하고 노동문제를 고발함으로써 노동행정 실태를 고발하고 노동정책의 일대 전환을 요구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이 죽은 뒤 근로기준법 준수, 노조활동 허용 등이 약속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하자 노동청장이 공개적으로 요구사항 이행을 약속한 후 장례를 치렀다. 같은 해 11월 17일 전태일의 친구들은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최초의 민주노조를 탄생시켰으며 전태일의 죽음은 이후 한국사회 민주화의 주요한 정신적 동력이 되었다.

주요출처 : 조영래 저, 『전태일 평전』 이원보 저,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전태일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전태일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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