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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

이 사건의 중심인물인 박형규, 권호경 등은 원래 `빈민도 시민의 일원이다. 빈민도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신념에 따라 판자촌을 중심으로 한 도시빈민 선교활동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와우아파트붕괴사건, 광주대단지사건 등을 보면서 주민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깨닫고 1971년 9월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결성해 청계천 등지에서 주민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1972년 10월유신이 선포되면서 주민운동은 벽에 부딪쳤다.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개방적이고 자율적인 주민운동은 불가능했다. 주민운동보다 민주주의의 회복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그들은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부활절 기념예배를 민주화의 필요성을 알릴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기로 했다.

1973년 4월 22일, 그들은 ‘신도여, 부활하신 왕, 주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 꽃피우자’, ‘민주주의는 통곡한다’ 등의 플래카드와 ‘민주주의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는 내용의 전단을 준비하고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신도들의 무관심 속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단지 KSCF 회원들이 새벽 연합 예배에 참석하고 귀가하는 교인들에게 일부를 배포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전단이 당국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 미미한 사건은 내란예비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각색되었다. 1973년 7월 6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서울제일교회 목사 박형규(50)·동교회 전도사 권호경(32)·전 신민당 조직국 제2부 차장 남삼우(35)·이종란(27) 등 4명을 내란 예비 음모 혐의로 구속하고, 다른 관련자 11명을 검거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9월 25일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박형규·권호경에게 각각 징역 2년을, 남삼우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하고, 이종란에게는 징역 1년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선고 이틀만인 9월 27일 서울형사지방법원은 박형규·권호경·남삼우에 대한 보석을 결정했다.

1973년 4월 남산 야외음악당 개신교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은 반유신운동이 최초로 표면에 떠오른 사건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사건은 기독교가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사건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 사건 이후 박형규는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수 차례의 옥고를 겪으면서 문익환·계훈제·백기완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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