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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방직사건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동일방직 민주노조운동은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70년대 노동운동에서 나타나는 여러 전형적인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존의 전통적인 어용노조에서 민주노조가 형성되고 내부로부터 조합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 자본과 권력의 가혹한 탄압과 이에 대한 저항, 폭력적인 노동규율, 회사 내에서 비인간적인 노무관리, 가부장적 노사문화와 남성폭력, 종교인·학생·지식인과 노동운동의 결합 등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동일방직사건은 1970년대 노동운동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동일방직주식회사는 인천시 동구 만석동에 있던 회사로 광목·포플린·재봉실·혼방직물·면직물을 생산하여 국내시판과 일부를 수출하고 있었다. 당시 노동자의 수는 약 1,300여 명으로 여성이 1천여 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조직으로는 산별체제하의 어용노조가 있고 근로조건은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1966년경부터 가톨릭노동청년회, 인천산업선교회 등의 협력으로 일찍부터 소그룹운동이 전개되었고,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이 높았다. 이를 바탕으로 1972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지부장으로 주길자를 선출하여 여성 노조집행부를 구성하였다. 집행부 구성 이후 회사의 혹독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노조원들에게 욕설과 협박은 물론 출근정지, 부서이동, 사표강요, 부당해고를 일삼았다. 탄압이 심할수록 조합원들은 더욱 단결하여 투쟁했다.

1975년 새 지부장 선출에서도 절대 다수의 지지로 이영숙을 새 지부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에 회사는 집요하게 노조집행부를 남성중심의 어용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다. 1976년 2월의 대의원 선거에서는 노골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4월의 정기대의원대회는 회사 측이 일부 조합원을 사주하여 유산시켰고, 7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회사측과 노동조합의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회사측 어용 남성노동자들이 이영숙 지부장에게 폭행을 가했고, 경찰은 이지부장을 연행해 갔으며, 경기도는 남성노동자들이 조직한 조합을 인정했다. 이에 저항하는 여성 노동자 2백여 명은 기숙사에 감금당했다. 그러나 창문을 부수고 나온 여성노동자들은 노조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였고, 300~500여 명에 이르는 여성노동자들이 교대로 24시간 투쟁했다. 7월 25일 저녁 6시 30분, 기동경찰은 연행버스를 대기시키고 방망이를 들고서 이들을 포위했다. 경찰은 5분간의 여유를 줄테니 자진해산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여성노동자들은 아무리 비열한 경찰일지라도 옷을 벗으면 손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옷을 벗고 경찰에 항의했다. 그러나 경찰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구타하고 연행해갔다. 72명이 연행되고, 40명이 기절하고 14명이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것이 일명 ‘동일방직 노동자의 나체시위 투쟁’이었다.

이후 정부, 섬유노조, 회사 측의 갖은 탄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투쟁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사회 양심 세력에게 이때까지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 해결책을 찾는 ‘사건해부식’을 갖기로 하였다. 이에 문제의 확산을 우려한 노동청이 합의를 주선하였다. 1977년 4월 4일 ‘동일방직분규수습대책’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청 감시 하에 대의원 대회가 열려 여성인 이총각 총무가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78년 2월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섬유노조는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 한국노총이 위촉한 수습위원에게 지부장 권한을 인계하도록 하고, 회사 측은 조합원들을 매수하여 대회를 무산시키려 하였다. 섬유노조와 회사 측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2월 21일 동일방직노조가 대의원 선출을 위한 투표를 감행하려하자 또 다시 회사측 남성노동자들이 습격해 왔다. 이번에는 똥을 날라다가 여성조합원들의 입, 가슴, 옷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바르는 짓을 자행했다. 심지어는 똥걸레로 문지르고 입에 먹이기까지 하였다. ‘아무리 가난하지만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는 똥은 먹고 살 수 없다’고 절규하는 여성노동자들을 경찰들은 구경만 하였고,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노조원들에게는 냉소와 욕설을 퍼부었다. 세상이 분노한 이 사건이 소위 ‘동일방직 똥물세례 사건’이다. 이날 대의원선거에서 40여개의 투표함이 박살났고, 5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섬유노조는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하고 집행부 전원을 제명처분 하였다. 하지만 정부와 섬유노조, 기업주가 공모한 이 사건의 진상과 탄압을 알리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 되었다.

3월 10일 ‘근로자의 날’ 행사장인 장충체육관에서 동일방직 노동자 80여 명이 김영태 퇴진과 동일방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기습시위를 벌여 강제퇴장당하고 31명이 연행되었다. 이후 동일방직노조 문제 해결과 산업선교회의 탄압 중지를 촉구하는 노동자들과 신·구교 종교인들의 단식농성이 시작되었고, 노동자들은 3월 20일 기독교방송국에 진입하여 노동문제에 침묵하는 언론에 항의하였다. 마침내 4월 1일 회사 측은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노동자 126명을 해고하였다. 섬유노조는 이들 해고자 명단을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봉쇄하였다. 최초의 블랙리스트가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이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고, 장기전으로 전환했다. 현장복귀투쟁, 임시노동조합 구성, 섬유노조위원장 김영태의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당선저지투쟁, 섬유노조 조직국장 우종환의 거짓증언에 대한 응징, 연극공연, 동지회보 발간 등을 통해 투쟁이 이어졌다. 기약 없는 투쟁에 수난도 컸다. 10·26 이후 동일방직 해고자 복직투쟁의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복직을 위한 연대투쟁을 함께했고, 김영태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집간 조합원들이 아기까지 데려와 노총회관 점거농성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0·26 이후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던 동일방직 사건은 1980년 5·17사태로 모든 운동이 종지부를 찍었다. 9월 30일 서울고법 제3특별부는 이총각 외 12인이 요청한 ‘해고예고예외인정 재심신청기각결정 취소의 소’를 기각하였다.

동일방직 사건은 단순한 노사분규가 아니라, 정부·노총·회사가 한패거리가 되어 신·구교 산업선교와 노동운동을 파괴, 말살하려는 음모의 결정판 이었다. 따라서 동일방직사건은 단순한 노동운동차원을 넘어 생존권적 요구조차 억압하는 유신체제에 대항한 반유신 민주화운동이며, 인권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주요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편,『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편,『1970년대 민중운동연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유신과 반유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민주화운동관련 사건· 단체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1970년대)보고서Ⅰ』 김정남,『진실, 광장에서다』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엮음,『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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