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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 및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1986년은 이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권의 정통성과 재집권을 가늠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1월 16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정연설을 통해 88올림픽 개최를 이유로 개헌논의를 1989년까지 유보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신민당과 민추협은 ‘민주개헌을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하였고, 재야·종교계·학계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시국선언 및 개헌 서명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학생들도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 집회에 참가하여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 펼쳤다. 정부는 개헌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이 커지자 개헌요구를 잠재우기 위해 연일 공안 사건을 터뜨리며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도하는 등 정국을 경직사태로 몰고 갔다. 당시 학생운동진영은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와 반제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민민투)로 분열되어 있었다. 하반기 들어 학생들은 그동안의 분열을 반성하면서 투쟁방향을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조국통일촉진투쟁으로 설정하고, 대규모 연대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이하 애학투련) 발족식을 거행한다.

1986년 10월 28일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은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조국통일 등의 구호를 내걸고 애학투련을 발족시키기 위해 건국대에 집결하였다. 애학투련 발족식 도중 경찰들은 최루탄을 쏘며 학내에 진입하였다. 학생들은 경찰을 피해 본관 등 5개 건물로 피신하였고, 경찰의 포위로 31일까지 4일에 걸쳐 강제된 점거농성을 벌였다. 정부는 애학투련이 반미투쟁과 조국통일 촉진투쟁을 전면에 내걸고 반공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맞서자 이를 빌미로 학생들을 좌경용공으로 몰아갔고,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위기의식을 조장하였다. 농성 기간 동안 건국대 측은 경찰에게 병력 철수를 요청했고, 학생들도 안전한 귀가를 보장하면 자진 해산하겠다는 뜻을 경찰에 전달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거부하고 단수·단전조치를 취하면서 학생들을 압박하였다. 학생들은 식량 부족과 추위로 탈진해 갔다. 농성 4일째인 31일 아침, 경찰은 헬기와 소방차, 총 53개 중대 8,00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한 입체작전(작전명 ‘황소 1호’)을 펼쳐 1,525명의 학생들을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53명의 학생들이 화상과 타박상을 입고 입원하였다. 이들 중 1,290여 명이 구속되었으며,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공산혁명분자 점거난동사건’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애학투련은 전국 주요 23개 대학의 투쟁위원회 연대조직이다. 발족선언문을 통해 이전의 학생운동이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인 투쟁에만 매달려 학생 대중들과 괴리되어 고립되었음을 반성하면서 민주적인 과정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로 지도부를 구성하고,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준수하며, 사상의 통일을 통해 대중노선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급진적인 슬로건과 투쟁형태 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애학투련이 표방했던 대중노선은 애학투련이 결성과 동시에 와해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후 학생운동의 기본방향으로 채택되었다. 학생들은 학생회를 중심으로 대중사업을 전개하는 방식의 활동을 펼쳤고, 이는 87년 6월 민주항쟁에 많은 청년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라는 학생운동 조직을 만들어 내는 바탕이 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10.28 건대항쟁 2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편,『10.28 건대항쟁 20주년 기념자료집』 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 및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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