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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

1990-1991년은 경제성장률이 9%를 상회하는 고도성장을 이루었지만 경상수지 적자, 물가불안, 증시폭락, 부동산가격 폭등이라는 부작용도 낳았다. 이러한 경제변화로 인한 자금과 노동력의 흐름의 왜곡, 수출과 설비투자의 부진은 실물경제, 특히 제조업의 위축을 초래했다. 그 결과 제조업의 성장이 둔화되었고 경공업부문이 크게 위축되어 중소영세기업의 휴폐업이 속출했으며, 건설업부문은 급속히 팽창하는 등 산업부문간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한편 1990년 1월에 민정당·공화당·민주당이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통합된 3당합당은 노태우 정권에게 보다 적극적인 노동통제를 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제공했다. 정부의 노동정책은 두 갈래로 추진되었다. 그 하나는 임금억제이고 다른 하나는 노조운동에 대한 통제였다. 먼저 임금억제정책은 임금상승추세와 노동력 수급불균형,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과 선진국의 시장개방 압력에 대응하여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임금정책은 임금인상 억제와 임금체계 개편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임금인상 억제정책은 1990년과 1991년 ‘한자리수 임금인상 억제’를 유도한다는 것이 중점이었다. 임금체계 개편은 임금인상을 총액 기준으로 결정하고 인상수준은 5% 이내로 한다는 이른바 ‘총액임금제’로 집약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노동조합의 강한 반발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음으로 노동조합 통제정책은 강경대응으로 일관하였다. 1990년 KBS 노조의 방송민주화투쟁(별도항목 참조)과 현대중공업 파업, 전노협 와해를 노린 대대적인 업무조사, 1991년의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 간부들에 대한 구속사태와 대우조선노조 파업, 1992년 총액임금제분쇄투쟁 등에 대한 정부의 물리적 강경대처 등이 그 예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구속된 노동자 수는 노태우 정권 5년 동안 1,973명에 이르렀다. 보수정치권이 3당합당을 단행하던 날인 1990년 1월 22일 민주노조들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위원장 단병호)를 결성했다.

전노협은 창립선언문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하였음”을 밝히고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노동자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사회구조의 개혁과 조국의 민주화, 자주화,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제 민주세력과 굳게 연대하여 투쟁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전노협은 “기업별 노조체제를 타파하고 자주적인 산별노조의 전국중앙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총 매진할 것”임을 천명했다. 전노협은 1970년대, 198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계승한 조직이면서 1987년 이후 전개된 노동자 투쟁을 통해 축적된 조직적 성과일 뿐만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을 위한 전국적 구심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전노협의 결성배경은 첫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 ‘7·8월 노동자대투쟁’ 항목 참조)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 수호와 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중적 열망이 증폭되었고, 민주노조운동의 양적토대가 확충되었다는 것, 둘째 1988년 말부터 정권은 이념적 제도적 물리적 측면에서 총체적 탄압을 자행했으며, 이에 따라 민주노조진영에서는 탄압대응을 위한 전국적 연대조직 건설이 절박하게 제기되었다는 것, 셋째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대한 자연발생적 연대조직인 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의 건설과 노동법 개정투쟁, 공동임금투쟁 등을 매개로 한 전국적 투쟁과정에서 조합원 대중의 초보적인 정치적 의식이 형성되었다는 것, 넷째 40여 년 간 자본과 정권의 입장에서 노동자 위에 군림해 온 어용적이고 노사협조적인 한국노총에 대한 대중적 불신이 확대되었다는 것, 다섯째 자주적 노동운동 조직의 적극적인 결합으로 전국조직 건설의 필요성과 조직사업 및 투쟁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지원, 지도가 결합되었다는 것 등이다. 결성 당일 전노협은 경찰의 봉쇄망을 피해 수원 성균관대학교에서 800여 명의 대의원을 포함한 1천 5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대회를 진행하였는데, 당일에만 노동자와 학생 등 141명이 연행되었다.

전노협은 14개 지역협의체와 2개 업종별 조직, 456개 단위노조, 조합원수 16만 6천여 명으로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전노협이 결성되어 활동에 들어가자 정부와 자본측은 제3자 개입금지 위반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전노협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90년 들어 노조간부 262명을 구속했고, 지노협 의장 10여 명을 수배했다. 또 전국 160여 개 사업장 노조에 대해 업무조사를 실시하고 업무조사를 거부한 70여 개 노조를 고발했다. 그리고 전노협을 ‘불법단체’로 규정하여 전노협이 주최한 모든 집회나 행사를 봉쇄했다. 정부와 자본측의 이런 탄압과 통제에 대해 전노협은 다양한 측면에서 투쟁을 전개했다. 1990년 4월 6일부터 8일까지 명당성당에서 전노협 간부 100여 명이 철야 단식농성을 벌였고, 단위노조에서는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농성을 전개했다. 4월 8일에는 단식 농성을 끝낸 전노협 간부와 노조 간부 500여 명이 명동성당에 집결하여 ‘임금교섭 중간보고, 노동부장관 퇴진, 노동운동탄압 분쇄 결의대회’를 열었다. 전노협은 또 노동부의 업무조사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거부 방침을 정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했다. 이와 더불어 전노협은 노동운동 탄압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2월 24일과 25일 ‘반민주 3당 야합 분쇄 및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대회’를 전국 동시 다발로 개최했다. 또 3월 3일부터 5일까지 비상중앙위원회 철야농성에 이어 3월 8일부터 9일까지 지역, 지구단위 농성을 조직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3월 14일에는 전국 단위사업장 총회와 동시퇴근 투쟁, 대국민 선전전을 벌였으며, 3월 18일에는 ‘노동운동 탄압 분쇄와 1990년 임금인상 투쟁 승리 전진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업무조사가 집요하게 진행되어 전노협의 조직력을 훼손시켰다. 업무조사를 받은 사업장은 19개, 전노협 탈퇴 사업장은 29개에 이르렀으며, 고발된 사업장은 59개나 되었다.

전노협은 창립의 역사적 의의를 첫째, 전노협 출범은 정부와 자본의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운동을 사수하고 투쟁할 수 있는 천만 노동자의 전국적 구심이 쟁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전노협 건설은 그 자체가 민주노조운동 사수투쟁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전노협 출범은 오랜 기간 단절되었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복원시킨 것이며,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하였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셋째, 전노협 출범을 통하여 투쟁과제와 조직과제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진로를 분명히 하고 자주적인 산별노조의 전국적인 중앙조직을 강화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기획/김금수 저,『한국노동운동사』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노동운동역사자료실 편, 전노협 백서 제3권(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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