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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학생연맹·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학림사건)

5.17 계엄 전국확대와 광주 학살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학생운동 역시 구속, 수배, 제적, 강제징집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전두환 정권의 총칼 앞에 오직 침묵과 굴종만이 있었다. 이 폭압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학생들은 가장 빨리 전열을 정비하고 용감하게 맞섰다. 그 한가운데에 전국민주학생연맹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활동이 자리 잡고 있다.

학생운동 내부에서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 조직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난 직후였다. 그들은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난 것이 당시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학생운동 지도부가 군부에 맞서 철저히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군부가 자행한 광주 학살은 국민 대중의 가슴 속에 풀릴 수 없는 분노로 응어리져 있었다. 군부독재에 대한 철저한 항전 의지로 무장한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이 필요했다.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을 구상하던 이선근은 흥사단아카데미 선배인 이태복과 의논했다. 도서출판 광민사 사장이었던 이태복은 평소 학생운동은 문제제기 집단으로서 끊임없는 정치투쟁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운동이 그 성과를 받아 역량 강화에 힘쓰면서 궁극적으로 문제해결 집단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선근과 이태복은 인식을 같이하고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을 건설하는 데 이선근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이태복은 중요 사항만 관여하기로 대략적인 합의를 보았다. 2학기가 되면서 ‘서울의 봄’의 실패 원인과 향후 운동 방향을 놓고 학생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무림’과 ‘학림’ 논쟁으로 알려진 이 논쟁에서 당시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던 학생운동 지도부 무림 쪽은 아직 대중운동의 역량이 미성숙하였기 때문에 군부독재와의 전면적인 투쟁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고, 학림 쪽은 광주학살로 군부독재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극에 달한 지금이야말로 학생들이 군부독재와 전면적인 투쟁을 벌여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무학논쟁은 학생운동사상 최초의 집단적 이론투쟁이었다.

1981년 2월 27일 마침내 전민학련이 결성됐다. 전민학련은 회칙 전문에서 “학원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한국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기만과 폭력에 가득 찬 현 정권의 위기를 심화시켜 민주화의 열기를 불태울 것”을 다짐하면서 최고 기관으로 중앙위원회를 두고 그 산하에 도급 단위에는 지부를, 그 밑에 지역별로 지회를, 그리고 대학별로 지반을 두었다. 전민학련은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학생들이 주축이 돼 만든 비합법 지하조직이었던 셈이다. 1981년 봄 전민학련 주도로 학생 시위가 재연되기 시작했다. 3월 19일 서울대 시위를 시발로 5월 중순까지 성균관대, 부산대 등에서 모두 8차례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5월 27일에는 서울대생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며 도서관 6층에서 투신자살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하지만 1981년 6월 10일 이태복이 연행되고, 곧이어 6월 16일 이선근·이덕희 등 전국민주학생연맹 관련자 수십여 명이 연행되었다. 검찰은 그 중 전민학련을 따로 떼어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구체적인 물증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필연적으로 혹독한 고문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약 한 달에서 최고 60일까지 외부와 완전 차단된 채 고문수사를 받았다. 결국 1982년 1월 22일 조직총책이자 반국가단체‘수괴’인 이태복이 무기징역을 받는 등 모두 25명의 관련자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1980년에서 1983년까지 학생 시위와 관련하여 구속, 제적된 학생은 1,400여명에 달했다. 광주에서 끔찍한 살육이 자행된 후 모든 민주세력이 공포에 휩싸여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을 때 큰 희생을 무릅쓰고 제일 먼저, 가장 치열하게 나선 것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힘입어 민주화운동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위원회는 이른바 '전민학련, 전민노련 반국가단체 조작의혹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였다. 또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7월 7일, 이른바 '학림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경찰과 검찰이 고문과 가혹행위로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사실을 규명했다고 밝히고 국가가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할 것과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2012년 6월 15일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국가보안법ㆍ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이태복(62)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학림사건 연루자 24명에 대한 재심사건 상고심에서 검사 상고를 기각,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의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했다는 점 등에 비춰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면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12ㆍ12, 5ㆍ18을 전후한 시기 신군부의 행위는 헌정질서 파괴 범죄였으므로 이를 저지ㆍ반대하려던 피고인들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덧붙였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유시춘 외, 『70·80 실록 민주화운동Ⅰ- 우리 강물이 되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보고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사료소개

‘전국민주노동자연맹사건’ 조건으로 총 16 건, ‘민학련’ 조건으로 총 5 건, ‘전민학련’ 조건으로 총 1건, ‘민노련’ 조건으로 총7건, ‘이태복’ 조건으로 총 45 건, ‘이선근’ 조건으로 총 4건이 검색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이 받았던 탄압 양상이 사료 곳곳에 나타나 있다. <호소문[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 관련 구속자들의 석방을 호소]>(112571)은 5~60일 동안 소식을 알 수 없이 불법 감금, 고문을 받았던 사건 관련자들의 억울함과 석방을 요구하는 가족의 글을 담고 있다. <외래의사진료원[이태복씨에 대한 진료 허가 요청문]>(120312)은 그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볼 수 있다. 또한 <사건 항소심에 대한 우리의 입장>(100973), <이른바 "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1심언도형량>(98199)은 사건 관련자들의 경찰의 가혹한 고문과, 정권의 꼭두각시로 사건을 조작하고 엄청난 형량을 언도한 검찰, 사법부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이태복 최후진술(1982.1.13. 대법정에서)>(524117)은 이태복을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을 통해 어떻게 그들이 “고문과 협박에 의해 빨간 사람”이 되었는지, 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내 아들은 이렇게 고문당했다[민노련, 민학련 사건의 이태복 관련]>(112571)은 구속된 지 7년 후에도 석방되지 못한 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들 이태복 씨가 공안사범으로 재분류될 위험에 처해있음을 고발함으로써 탄압이 교도소 안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국민주학생연맹·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학림사건)

5.17 계엄 전국확대와 광주 학살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학생운동 역시 구속, 수배, 제적, 강제징집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전두환 정권의 총칼 앞에 오직 침묵과 굴종만이 있었다. 이 폭압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학생들은 가장 빨리 전열을 정비하고 용감하게 맞섰다. 그 한가운데에 전국민주학생연맹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활동이 자리 잡고 있다.

학생운동 내부에서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 조직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난 직후였다. 그들은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난 것이 당시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학생운동 지도부가 군부에 맞서 철저히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군부가 자행한 광주 학살은 국민 대중의 가슴 속에 풀릴 수 없는 분노로 응어리져 있었다. 군부독재에 대한 철저한 항전 의지로 무장한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이 필요했다.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을 구상하던 이선근은 흥사단아카데미 선배인 이태복과 의논했다. 도서출판 광민사 사장이었던 이태복은 평소 학생운동은 문제제기 집단으로서 끊임없는 정치투쟁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운동이 그 성과를 받아 역량 강화에 힘쓰면서 궁극적으로 문제해결 집단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선근과 이태복은 인식을 같이하고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을 건설하는 데 이선근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이태복은 중요 사항만 관여하기로 대략적인 합의를 보았다. 2학기가 되면서 ‘서울의 봄’의 실패 원인과 향후 운동 방향을 놓고 학생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무림’과 ‘학림’ 논쟁으로 알려진 이 논쟁에서 당시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던 학생운동 지도부 무림 쪽은 아직 대중운동의 역량이 미성숙하였기 때문에 군부독재와의 전면적인 투쟁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고, 학림 쪽은 광주학살로 군부독재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극에 달한 지금이야말로 학생들이 군부독재와 전면적인 투쟁을 벌여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무학논쟁은 학생운동사상 최초의 집단적 이론투쟁이었다.

1981년 2월 27일 마침내 전민학련이 결성됐다. 전민학련은 회칙 전문에서 “학원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한국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기만과 폭력에 가득 찬 현 정권의 위기를 심화시켜 민주화의 열기를 불태울 것”을 다짐하면서 최고 기관으로 중앙위원회를 두고 그 산하에 도급 단위에는 지부를, 그 밑에 지역별로 지회를, 그리고 대학별로 지반을 두었다. 전민학련은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학생들이 주축이 돼 만든 비합법 지하조직이었던 셈이다. 1981년 봄 전민학련 주도로 학생 시위가 재연되기 시작했다. 3월 19일 서울대 시위를 시발로 5월 중순까지 성균관대, 부산대 등에서 모두 8차례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5월 27일에는 서울대생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며 도서관 6층에서 투신자살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하지만 1981년 6월 10일 이태복이 연행되고, 곧이어 6월 16일 이선근·이덕희 등 전국민주학생연맹 관련자 수십여 명이 연행되었다. 검찰은 그 중 전민학련을 따로 떼어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구체적인 물증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필연적으로 혹독한 고문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약 한 달에서 최고 60일까지 외부와 완전 차단된 채 고문수사를 받았다. 결국 1982년 1월 22일 조직총책이자 반국가단체‘수괴’인 이태복이 무기징역을 받는 등 모두 25명의 관련자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1980년에서 1983년까지 학생 시위와 관련하여 구속, 제적된 학생은 1,400여명에 달했다. 광주에서 끔찍한 살육이 자행된 후 모든 민주세력이 공포에 휩싸여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을 때 큰 희생을 무릅쓰고 제일 먼저, 가장 치열하게 나선 것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힘입어 민주화운동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위원회는 이른바 '전민학련, 전민노련 반국가단체 조작의혹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였다. 또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7월 7일, 이른바 '학림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경찰과 검찰이 고문과 가혹행위로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사실을 규명했다고 밝히고 국가가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할 것과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2012년 6월 15일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국가보안법ㆍ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이태복(62)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학림사건 연루자 24명에 대한 재심사건 상고심에서 검사 상고를 기각,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의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했다는 점 등에 비춰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면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12ㆍ12, 5ㆍ18을 전후한 시기 신군부의 행위는 헌정질서 파괴 범죄였으므로 이를 저지ㆍ반대하려던 피고인들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덧붙였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유시춘 외, 『70·80 실록 민주화운동Ⅰ- 우리 강물이 되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보고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사료소개

‘전국민주노동자연맹사건’ 조건으로 총 16 건, ‘민학련’ 조건으로 총 5 건, ‘전민학련’ 조건으로 총 1건, ‘민노련’ 조건으로 총7건, ‘이태복’ 조건으로 총 45 건, ‘이선근’ 조건으로 총 4건이 검색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이 받았던 탄압 양상이 사료 곳곳에 나타나 있다. <호소문[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 관련 구속자들의 석방을 호소]>(112571)은 5~60일 동안 소식을 알 수 없이 불법 감금, 고문을 받았던 사건 관련자들의 억울함과 석방을 요구하는 가족의 글을 담고 있다. <외래의사진료원[이태복씨에 대한 진료 허가 요청문]>(120312)은 그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볼 수 있다. 또한 <사건 항소심에 대한 우리의 입장>(100973), <이른바 "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1심언도형량>(98199)은 사건 관련자들의 경찰의 가혹한 고문과, 정권의 꼭두각시로 사건을 조작하고 엄청난 형량을 언도한 검찰, 사법부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이태복 최후진술(1982.1.13. 대법정에서)>(524117)은 이태복을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을 통해 어떻게 그들이 “고문과 협박에 의해 빨간 사람”이 되었는지, 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내 아들은 이렇게 고문당했다[민노련, 민학련 사건의 이태복 관련]>(112571)은 구속된 지 7년 후에도 석방되지 못한 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들 이태복 씨가 공안사범으로 재분류될 위험에 처해있음을 고발함으로써 탄압이 교도소 안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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