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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 결성

공해와 핵을 추방하여 국민의 생명과 건강 및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한 공해추방운동은 1960~1970년대 경제성장 위주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급속도로 진행된 자연과 환경 파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인 환경오염, 공해, 자연 파괴, 직업병 등의 문제가 1980년대에 들어와서 가시화되었는데, 산업폐수, 농축산폐수, 생활하수 등에 의한 수질오염, 자동차 배기가스, 공장에서 유출되는 유독가스 등에 의한 대기오염은 이미 극심한 상태이며, 세계적으로 규제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경제성의 원칙만을 가지고 계속 건설함에 따라 방사능사고의 위협이 가중되고 있어서 국민대중의 환경권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창립되고 공해피해 주민들의 자발적 주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공해추방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공해 문제를 민간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한 최초의 시도가 1982년 5월에 결성된 공해문제연구소 (소장 최열, 기관지『공해연구』)의 설립이었다. 또한 1984년 12월에는 공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대학생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반공해운동협의회가 만들어졌으며, 1987년에는 공해 문제를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하고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의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앞서 주부 등 여성들이 중심이 된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가 1986년 9월 13일에 결성되어 각종 공해대책 강좌 및 공해 고발 전화를 개설했다. 위의 3개 단체는 공해 문제와 관련된 사안들을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연대활동을 자주 벌였는데,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이들이 통합하여 1988년 9월 10일 공해 추방·반핵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통일을 기한 ‘공해추방운동연합’ (공동의장 최열·서진옥 ·이덕희) 을 결성하였다.

공추련은 결성 이후 공해 문제를 유발하는 기업들을 사회문제화 시킴으로써 공해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고, 원전 건설, 영덕의 핵폐기물처리장 건설 반대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1990년 4월 15일 전국핵발전소추방운동본부 창설에 적극 가담하면서, 핵발전소 건설 반대 1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여 정부가 동해안에 핵폐기물 처분장을 건설하려던 계획을 백지화시키는 성과를 거두는 등 괄목할 만한 활동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공추련은 조직을 정비하고, 또한 많은 지역의 민간환경운동단체를 발족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현재의 환경운동연합의 모태가 되었다.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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