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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통일운동

1. 6ㆍ10 남북학생회담 추진 및 8ㆍ15 남북학생회담 출정식

1988년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 과정에서 김중기 후보는 ‘김일성대학 청년학생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을 통해 남북한 국토 종단 순례 대행진과 민족 단결을 위한 남북한 청년학생 체육대회를 제안하였다. 북한은 남북 적십자 회담용 직통 전화로 남한 측 적십자사 총재에게 김일성 종합대학 총장 및 학생위원회 명의로 서울대 총장 및 총학생회에 편지를 보내겠다고 알려왔다. 이에 대해 대한적십자사는 편지 접수 거부의사를 밝혔고, 학생들은 4월 15일 다시 서울대 총학생회 산하 ‘조국의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특별위원회’ 명의로 공개서한을 발송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토 종단 순례 대행진과 체육대회 개최를 위한 실무회담을 6월 10일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재차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위원회는 4월 4일 “귀 대학교 총학생회의 제의가 민족적 화해를 위하여 유익하고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절실한 애국적 발기로 된다”고 하면서, 제의에 적극적인 지지와 환영을 표시하며 6·10 실무회담에 응하겠다고 답하였다.

김중기에 대한 경찰의 수배가 떨어진 가운데 학생들의 6·10 회담 성사를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4월 16일에는 ‘한반도 평화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국민대토론회’가, 4월 18일에는 4·19혁명 26주년을 기념하여 고려대~수유리 구간에서 서총련 산하 서울지역 대학생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 구국 대장정 마라톤 대회’를 가졌다. 조국통일의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5월 14일 전국의 6개 지역 120여 개의 대학 학생 대표를 비롯한 2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고려대에서 전대협 주최로 ‘6·10 남북 청년학생 실무회담 성사 및 공동올림픽 개최를 위한 범시민 학생 결의대회’가 열렸으며, 그들은 6·10 회담이 소수가 아니라 대다수 애국 청년학도의 의지임을 확인하였다.

이날 전대협은 ‘남한의 백만 청년학도가 북한의 청년학도에게 보내는 3차 공개서한’을 통해 "반통일주의자 미국과 노태우에 대한 투쟁선언, 통일의 당위성 선언, 회담의 구체적 안건과 실무대표단 구성 및 일시 등을 백만 청년학도의 이름으로" 공식 확정하였다. 그와 함께 전국 각 대학에서는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지지하는 집회가 계속 열렸다. 5월 28일 전국의 각계각층 67개 운동단체가 조국통일운동의 성공적 전개를 위해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기로 하고 남북 공동 올림픽과 6·10 남북학생회담의 성사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6월 9일 오후 10시 연세대에서 ‘6·10 남북청년학생회담 성사를 위한 백만학도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10일에는 전국 2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연세대에서 ‘6·10 남북학생회담 출정식’을 개최하였다. 학생들은 ‘남북 청년학생 대동단결로 조국통일 앞당기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6·10회담 성사시켜 공동올림픽 쟁취하여 민족통일 앞당기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판문점행을 시도했다.

그러나 경찰의 최루탄 난사와 무차별 구타 등 폭력적 저지로 이날 하루에 2명이 뇌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고, 15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연행된 학생이 1,000여 명에 달했다. 6·10 회담이 무산된 뒤 연세대로 돌아와 철야농성에 들어간 학생들은 다음 날인 11일 ‘남한 학생회담 보고 및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어 오는 8월 15일 남북학생 실무회담을 개최할 것과, 8월 8일에서 14일까지 ‘민족화해를 위한 남북 해외동포 청년학생 국토종단 순례대행진’을 열 것을 북의 청년학생들에게 다시 제안했다. 6·10 회담 추진을 위한 투쟁은 통일운동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민통련 등 재야 50여 개 단체가 참여한 ‘통일염원 범국민 평화대행진 추진위원회’는 7월 2일부터 4일까지 ‘7·4 통일염원 범국민 평화대행진’을 추진했다. 당황한 노태우 정권은 이른바 ‘7·7선언’을 통해 민간의 통일열기를 정권차원으로 돌리려 했다. 8월 8일 ‘국토순례대행진’이 당국의 탄압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자, 11~12일 이틀에 걸쳐 전국 22개 대학생 6,000여 명이 ‘8·15 남북학생회담 출정식’ 및 ‘국토순례대행진 저지 규탄대회’등을 열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전대협의 통일선봉대와 대전지역대표자협의회 소속 대학생들은 12일 대전 한남대 중앙도서관 앞 자유의 광장에서 ‘국토순례대행진 저지 규탄대회 및 8·15 학생회담 성사를 위한 통일학도결의대회’를 가졌다. 이어 학생들은 오후 2시 20분쯤 대전역에서 열릴 예정인 ‘대전시민 통일선봉대 환영대회’에 참석키 위해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하면서,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이틀간의 시위 현장에서 1,780명을 연행하였다.

15일 연세대에서 ‘8·15회담 출정식’(단장 김중기)을 열고 1백여 명이 피로 쓴 ‘조국통일, 조국통일 만세’ 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몸을 서로 엮은 채 판문점을 향하고자 교문을 나섰으나 일명 ‘지랄탄’이 난사되는 가운데 무차별 구타를 당하며 5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16일 연세대에서 열린 ‘8·15 남북학생회담 원천봉쇄 규탄대회 및 통일염원제’를 끝으로 전대협이 추진해 온 두 차례의 남북학생회담 성사 투쟁은 일단락되었다.

2. 문익환 목사 방북

1988년의 6·10 남북학생회담 무산과 8·15 남북학생회담 출정식 등 청년학생들의 통일운동이 노태우 정권의 저지를 받고 각계의 남북교류 제의가 거부되는 등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중단된 남북간의 대화를 위해 1989년 3월 25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고문 문익환 목사와 유원호, 재일작가 정경모 3인의 방북이 결행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대변인인 작가 황석영도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에 앞서 1월 1일엔 북한 김일성이 신년사를 통해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하면서 남한의 각 정당 당수와 김수환 추기경, 백기완과 함께 문익환 목사를 초청했다. 문익환 목사는 평양공항에서 성명을 발표하여,“일찍부터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나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문목사 일행은 김일성 북한 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초청자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4월 2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7·4남북공동성명에서 확인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에 기초하여 통일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분열의 지속 반대, 정치군사회담 추진과 이산가족문제 등 다방면의 교류와 접촉 실현, 공존의 원칙에 입각한 연방제 방식의 통일지지, 팀스피리트 함동군사연습이 남북대화와 평화 및 통일과 양립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전민련이 제안한 범민족대회 소집을 지지하는 등 9개항을 합의했다.

문목사는 10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친 뒤 일본을 거쳐 4월 13일 귀국했다. 공안 당국은 문익환 목사 일행이 귀국하자마자 미리 발부받아 둔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하여 문목사 일행을 국가보안법상 지령수수, 잠입탈출, 회합통신, 찬양고무 등의 혐의로 김포공항에서 구속·수감했다. 정부의 창구단일화론을 정면으로 깨면서 이루어진 이들의 방북 행위는 커다란 충격과 함께 정부의 강경한 대응을 가져왔다. 정부는“문익환 목사 등의 평양 밀행이 김일성 집단의 일관된 대남분열정책의 소산”이며 반국가적 행동이기 때문에 구속 수사한다는 방침을 처음부터 천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여 재야 단체와 재야인사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북한과의 교류·접촉을 시도하던 리영희·고은·이재오·이부영·조성우 등 대표적인 재야인사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문 목사는 옥중에서 『통일을 비는 마음』과 『두 하늘 한 하늘』을 출간했으며, 1990년 10월 20일 형 집행정지로 19개월 만에 출옥했다. 그 후『가슴으로 만난 평양』, 『빼앗긴 변론』, 『걸어서라도 갈테야』 등 북한방문 관련 서적을 연이어 출간했고, 1994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임수경 방북 및 평양축전 참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평양에서 ‘반제연대성, 평화와 친선을 위하여’라는 기치아래 180여 개국의 대표들이 참가하여 개최되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축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4학년 재학 중인 임수경을 파견하였다. 임수경은 1989년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여 도쿄에 도착했고, 6월 28일 도쿄를 출발하여 6월 29일 서베를린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같은 날 다시 동베를린을 거쳐 평양으로 갔다. 6월 30일 오후 1시 30분에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도착한 임수경은 도착소감으로 “자동차로 네 시간이면 올 거리를 240시간이 걸려 왔다”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백만학도의 대표로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왔음을 알렸다.

7월 1일 오후 7시 평양 능라도경기장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 행사에 전대협의 대표 자격으로 전대협의 깃발을 앞세우고 참가하였다. 7월 7일 평양시내 청년공원 야외극장에서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조선 인민과 청년학생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연대성집회’가 열렸다. 평양축전에 참가한 여러 나라의 청년 대표들이 참석하여 연설하였는데, 마지막 순서로 임종석 전대협 의장의 위임에 따라 임수경과 조선학생위원회 김창룡 위원장이 8개 항으로 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들은 공동선언문에서 “조국통일은 남과 북의 우리 청년학생들의 삶과 투쟁의 최우선적 목표”라면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자주적으로 이룩해야 하며,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에로의 대체와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와 남북불가침선언 채택을 통해 평화통일을 이루며, 남북 교차승인과 유엔 동시가입 등 분단상태를 영구화하려는 두개의 한국정책 반대,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적 조건에서 쌍방의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며 민족대단결에 기초한 하나의 통일국가 창립을 위해 싸우며, 남북간 당국대화와 함께 민간대화 진행,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위해 청년학생 간의 접촉과 교류 지속, 남북간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고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며 1995년까지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투쟁을 벌인다”는 8개항을 발표했다.

평양축전이 끝나고 임수경 대표는 곧장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애당초 국제평화대행진은 세계의 평화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백두산과 한라산에서 각각 출발하여 판문점에서 만날 예정이었는데 남한 당국의 저지로 남쪽 행사는 무산되었다. 7월 20일 백두산 천지에서부터 시작하여 7월 27일 판문점에 도착한 임수경은 판문점 귀환에 동행하기 위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표로서 파견된 문규현 신부와 함께 미군 정전위원회에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요구하였다.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판문점 귀환이 거부되자, 8월 1일까지 6일간 판문점 귀환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8월 15일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분단 이래 최초로 판문점을 돌파하였다. 그 결과로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미군에 의해 연행되어 곧바로 구속되었다. 1990년 2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고 1990년 6월 11일 항소심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으며 1992년 12월 24일 석방되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조성된 공안정국 시기에 나 어린 여학생의 방북사건은 남과 북의 동포들에게 통일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켰으며, 이러한 통일 열기의 고양은 후일 전민련의 제안에 따라 범민족대회를 개최하는 계기를 만들게 하였고 노태우 정권으로 하여금 이른바 7·7선언을 통해 범민족대회의 성사에 협조할 의사가 있음을 선언하게 하였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문익환 저, 『걸어서라도 갈테야』 김형수 저, 『문익환 평전』 임수경후원사업회 편, 『어머니, 하나 된 조국에 살고 싶어요-임수경 옥중 방북백서』 한용 외, 『80년대 한국사회와 학생운동』

1980년대 통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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