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광주항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2일 토머스 로스 미 국방부 대변인은 "위컴 주한유엔군 및 한미연합군 사령관이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에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 4개 대대의 병력을 풀어주었다"고 발표하였고, 다음날인 1980년 5월 23일에는 호팅 카터 미 국무부 대변인이 "카터 행정부는 한국에서 안보와 질서의 회복을 지원하기로 하는 한편,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늦추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81년 2월 말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에게 미국의 지지를 확인해 주었다.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방조와 지지에 항의해서 일어난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은폐된 지 1년 3개월 후에 부산에서도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1982년 3월 2일 부산지역의 대학생들은 ‘살인마 전두환 북침 완료’라는 제목의“부산시민들이여 총궐기하자. 군부 정권 타도하자”는 내용의 벽보를 부산대 의대 부속병원 정문 앞 육교 기둥 18개소에 붙인 뒤 부산 시내서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3월 18일에는 문부식, 김은숙, 김화석, 박정미가 미국이 12·12 사태 때 신군부의 군사 행동을 방조하고 광주학살 및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을 지원·인정한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하였다. 이들은 부산 미문화원 현관에 휘발유를 붓고 방화한 후,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나라”는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문화원 내에서 책을 보고 있던 동아대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김미숙, 허길숙 등이 화상을 입었다.

3월 19일 당국은 남녀 6~7명의 ‘불순 분자’에 의한 방화로 단정하고 전 수사기관에 비상근무령을 내렸다. 서정화 내무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현상금 2,000만 원을 건 체포 담화문을 발표했다. 3월 30일 방화 및 불온 전단을 살포한 혐의자로 김화석, 이미옥, 최충언, 박원식, 최인순 등 5명을 검거하고, 주범 문부식과 그의 여자 친구 김은숙을 수배했다. 마침 원주교구 교육원에 도피 중이던 문부식·김은숙과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김현장의 문제로 최기식 신부가 한강성당 주임신부이던 함세웅 신부에게 그들의 자수문제를 상의하자, 3월 31일 함세웅 신부가 한강성당에 교적을 두고 있던 청와대 허삼수 정무수석과 그 문제를 논의하면서 자수할 경우 고문을 받지 않고 법률적인 지원 보장을 확약 받았다. 이에 사건 발생 14일 만인 1982년 4월 1일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한데 이어 방화범 3명과 전단살포자 3명, 의식화 학습을 같이 한 3명 등 11명이 검거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루 뒤인 4월 2일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이 사건과 상관없이 ‘전두환 살육작전’이란 유인물을 배포한 것과 관련하여 은신 중이던 김현장이 문부식과 김은숙에게 의식화 학습을 지도했다는 사유로 사건의 배후조정혐의가 씌워져 체포되는가 하면, 당시 가톨릭 원주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체포되었고 문길환(37, 원주교구 보일러 기사), 이창복(43,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 정인재(37, 가톨릭 농민회 원주교구 부회장), 원주 치악산서점 김영애 등 15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계엄령,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최하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에서 최고 사형까지 판결을 선고받았다. 한편 교회에 대한 음해에 접한 김수환 추기경은 4월 11일 부활절 강론에서 천주교 탄압에 항의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주교단 상임위원회, 교회사회선교협의회도 역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12·12 사태 때 신군부의 군사 행동을 방조하고, 광주항쟁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3일 위컴 한·미 연합군 사령관이 연합사소속 병력의 광주 시위 진압에 동의하는 등 미국이 광주학살 및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을 지원·인정한 것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 독재 정권을 지속적으로 인정·지원함으로써 독재가 강화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였으며, 종교인의 구속으로 교회와 국가권력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종교계에 커다란 방향을 일으켰고, 투쟁의 성격이 격렬했고 대담하여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재야운동권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암흑속의 횃불』제 5권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원회,『1980년대 민주화운동』Ⅷ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사료소개

‘부산미문화원’ 조건으로 총 127 건, ‘김현장’ 조건으로 총 63 건 , ‘문부식’ 조건으로 총 40 건, ‘최기식’ 조건으로 총 68 건이 검색되었다. 김현장 외 15명에 대한 공소장(등록번호 : 112095), 김현장, 문부식의 최후진술(등록번호 : 523063, 483473), 김현장의 항소이유서(등록번호 : 482979 )문부식의 항소이유서(등록번호 : 482977 )와 탄원서(등록번호 : 482984), 최기식 신부의 양심선언 (등록번호 : 207833 ), 홍성우 변호사의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변론내용>(등록번호 : 482965), 최기식 신부의 강론 <강론-부산 미문화원 사건과 우리의 나아갈 길>(등록번호: 484128 ), <최기식신부사건 공판에서의 함세웅 신부 증언>(등록번호:100946 ) 등 사건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료들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망라되어 있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광주항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2일 토머스 로스 미 국방부 대변인은 "위컴 주한유엔군 및 한미연합군 사령관이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에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 4개 대대의 병력을 풀어주었다"고 발표하였고, 다음날인 1980년 5월 23일에는 호팅 카터 미 국무부 대변인이 "카터 행정부는 한국에서 안보와 질서의 회복을 지원하기로 하는 한편,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늦추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81년 2월 말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에게 미국의 지지를 확인해 주었다.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방조와 지지에 항의해서 일어난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은폐된 지 1년 3개월 후에 부산에서도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1982년 3월 2일 부산지역의 대학생들은 ‘살인마 전두환 북침 완료’라는 제목의“부산시민들이여 총궐기하자. 군부 정권 타도하자”는 내용의 벽보를 부산대 의대 부속병원 정문 앞 육교 기둥 18개소에 붙인 뒤 부산 시내서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3월 18일에는 문부식, 김은숙, 김화석, 박정미가 미국이 12·12 사태 때 신군부의 군사 행동을 방조하고 광주학살 및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을 지원·인정한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하였다. 이들은 부산 미문화원 현관에 휘발유를 붓고 방화한 후,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나라”는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문화원 내에서 책을 보고 있던 동아대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김미숙, 허길숙 등이 화상을 입었다.

3월 19일 당국은 남녀 6~7명의 ‘불순 분자’에 의한 방화로 단정하고 전 수사기관에 비상근무령을 내렸다. 서정화 내무장관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현상금 2,000만 원을 건 체포 담화문을 발표했다. 3월 30일 방화 및 불온 전단을 살포한 혐의자로 김화석, 이미옥, 최충언, 박원식, 최인순 등 5명을 검거하고, 주범 문부식과 그의 여자 친구 김은숙을 수배했다. 마침 원주교구 교육원에 도피 중이던 문부식·김은숙과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김현장의 문제로 최기식 신부가 한강성당 주임신부이던 함세웅 신부에게 그들의 자수문제를 상의하자, 3월 31일 함세웅 신부가 한강성당에 교적을 두고 있던 청와대 허삼수 정무수석과 그 문제를 논의하면서 자수할 경우 고문을 받지 않고 법률적인 지원 보장을 확약 받았다. 이에 사건 발생 14일 만인 1982년 4월 1일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한데 이어 방화범 3명과 전단살포자 3명, 의식화 학습을 같이 한 3명 등 11명이 검거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루 뒤인 4월 2일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이 사건과 상관없이 ‘전두환 살육작전’이란 유인물을 배포한 것과 관련하여 은신 중이던 김현장이 문부식과 김은숙에게 의식화 학습을 지도했다는 사유로 사건의 배후조정혐의가 씌워져 체포되는가 하면, 당시 가톨릭 원주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체포되었고 문길환(37, 원주교구 보일러 기사), 이창복(43,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 정인재(37, 가톨릭 농민회 원주교구 부회장), 원주 치악산서점 김영애 등 15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계엄령,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최하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에서 최고 사형까지 판결을 선고받았다. 한편 교회에 대한 음해에 접한 김수환 추기경은 4월 11일 부활절 강론에서 천주교 탄압에 항의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주교단 상임위원회, 교회사회선교협의회도 역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12·12 사태 때 신군부의 군사 행동을 방조하고, 광주항쟁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3일 위컴 한·미 연합군 사령관이 연합사소속 병력의 광주 시위 진압에 동의하는 등 미국이 광주학살 및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을 지원·인정한 것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 독재 정권을 지속적으로 인정·지원함으로써 독재가 강화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였으며, 종교인의 구속으로 교회와 국가권력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종교계에 커다란 방향을 일으켰고, 투쟁의 성격이 격렬했고 대담하여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재야운동권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암흑속의 횃불』제 5권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원회,『1980년대 민주화운동』Ⅷ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사료소개

‘부산미문화원’ 조건으로 총 127 건, ‘김현장’ 조건으로 총 63 건 , ‘문부식’ 조건으로 총 40 건, ‘최기식’ 조건으로 총 68 건이 검색되었다. 김현장 외 15명에 대한 공소장(등록번호 : 112095), 김현장, 문부식의 최후진술(등록번호 : 523063, 483473), 김현장의 항소이유서(등록번호 : 482979 )문부식의 항소이유서(등록번호 : 482977 )와 탄원서(등록번호 : 482984), 최기식 신부의 양심선언 (등록번호 : 207833 ), 홍성우 변호사의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변론내용>(등록번호 : 482965), 최기식 신부의 강론 <강론-부산 미문화원 사건과 우리의 나아갈 길>(등록번호: 484128 ), <최기식신부사건 공판에서의 함세웅 신부 증언>(등록번호:100946 ) 등 사건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료들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망라되어 있다.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