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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 하의 통일운동

4월혁명의 결과 세워진 제2공화국에서 통일운동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엔 북진통일 외에 어떤 통일 논의도 용납하지 않았다. 평화통일을 주장한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진보당은 정당 등록 취소처분을 받았다. 그러다가 4월혁명으로 통일이나 민족자주의 문제가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게 되었다.국제적으로는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반둥회의와 후에 비동맹국가들로 불려지는 인도・이집트・유고슬라비아 지도자들의 움직임, 이집트 나세르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쿠바에서 카스트로의 집권, 알제리와 콩고 등에서의 반제국주의투쟁 등이 통일운동과 민족자주화 운동의 토양이 되었다. 통일문제는 1960년 7・29총선 당시엔 중요 쟁점이 못 되었다. 여전히 레드컴플렉스가 사회 전체를 압박하였다.

그렇지만 총선을 전후해 일본과 미국에서 통일운동을 벌였던 김삼규와 김용중의 중립화통일론이 국내에 소개되면서부터 통일 논의의 불이 지펴지기 시작했다. 한편 학생시위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북의 김일성은 8월 14일 당분간 남북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면서 남북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연방제를 제안했으나, 당장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10월 22일 미국 등 강대국이 1955년에 오스트리아를 중립화했던 방식으로 한국중립화통일을 모색해야 한다는 맨스필드 미하원의원 주장이 큰 파문을 던졌다.

대중적인 통일 논의는 민족문제에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9월 24, 25일 고려대에서 열린 전국대학생시국토론회에서는 중립화통일운동을 펼치자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11월 1일 서울대 민족통일연맹(민통련) 발기모임은 대정부 및 사회 건의문에서 기성세대는 분단의 책임을 통감하고 젊은 세대의 발언을 억압하지 말 것, 정부는 통일문제에 적극 외교로 전환해 미・소의 지도자들과 회담할 것, 남북서신교환을 한시바삐 시행할 것 등을 요구했다. 다음 날 정부는 오스트리아식 중립화통일을 반대하면서 국가보안법의 개정 또는 보강을 시사했고, 야간 국회에서는 “대한민국헌법 절차에 의하여 자유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이승만 시대의 통일방안으로 회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도 우려를 표명했다. 1961년에 들어와 혁신계 정당은 정비되어갔고, 2월 25일에는 진보세력의 통일운동 구심체로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가 결성되었다. 민자통은 자주・평화・민주를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천명했는데, 강대국의 협의에 의한 중립화통일론보다 민족자주에 입각한 남북협상론에 기울어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들어오면서 “이남 쌀, 이북 전기” 같은 구호가 나왔다. 1961년 2, 3월에는 이른바 반미자주화운동과 2대 악법 반대투쟁이 전개되었다. 2월 8일 감독권 강화 등 미국의 일방적 요구가 많이 들어 있는 한・미경제협정이 맺어지자 혁신계와 학생들은 투쟁위원회를 조직해 반대운동을 벌였다. 서울 시내 7개 대학 민통련이 주축이 된 전국학생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위원회에서는 2・8협정을 “예속적・식민지적 불평등협정”이라고 규정하고, 해방 후 미국이 반민족적 분자들과 결탁해 우리 조국을 분할했다고 주장했지만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한편 장면 정부가 학생들과 혁신계의 통일주장에 반공법 제정으로 대응하려 하고 집회 및 시위를 막기 위해서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혁신계와 학생들은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반대하는 2대 악법 반대투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2대 악법 반대투쟁은 통일운동으로 지반이 넓어진 혁신계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데 기여시켰다. 장면 정부는 악법 반대투쟁에 이어 1961년 4월 유엔총회 결의로 또다시 시련에 부닥쳤다. 유엔회원국으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국가가 급증해 최대 블록을 형성하였고, 인도네시아가 유엔에 남북을 동시에 초청하자는 안을 내자 주유엔미국대사 스티븐슨은 북이 “유엔 권위를 수락한다면”의 조건을 달아 남북대표동시초청안을 냈고, 그것이 4월 12일 유엔정치위원회에서 가결되었다.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한 이 결의안에 장면 정부는 지지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북측 대표와의 동석은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1961년 4월과 5월에 학생들은 통일운동을 더욱 확대했다.

4・19 한 돌을 맞아 서울대생들은 침묵시위를 했다. 그리고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4・19제2선언문’에서 반봉건・반외압세력・반매판자본의 3반(反)운동을 펴겠다고 선언했다.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한 것에 이어 5월 5일 19개 대학이 참여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대회에서는 제3세계의 민족해방론적 통일관이 강렬히 표출되어 있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남북학생회담을 판문점에서 열 것을 제안했다. 5월 13일 민자통 주최로 약 3만 명이 모인 가운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가 열렸다. 급진적인 통일운동은 4월혁명으로 위축된 극우반공세력을 불안하게 했고, 쿠데타 모의자들한테 하나의 구실을 제공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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