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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5 마산시위 (3ㆍ15의거)

1948년의 정부수립 이래로 이승만 정부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보다는 친미와 반공을 앞세우면서 반민족 친일행위에 대한 단죄를 목적으로 1948년 10월에 발족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부패특권 세력에 부를 편중시킨 반민주주의 독재 정권으로,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종신집권을 꾀한 ‘사사오입개헌’을 자행하고 정적제거를 위해 진보당사건(상세는 별도 항목 참조)을 조작하여 조봉암을 처형했다. 또 언론자유를 정면에서 말살한 경향신문 폐간 등 끝없는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하에서 1960년에 일어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했다. 4․19혁명은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일 당일의 3․15마산 시위, 그리고 4․18 고려대생 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에 이어 절정에 이른 4월 19일의 대규모시위(상세는 별항 ‘4월 19일 시위’ 참고)와 4․25 대학교수단 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로 전개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4대 정부통령 선거는 대대적이고 노골적인 선거부정 속에서 치러졌는데, 지방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곳곳에서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민주당 참관인 축출 등 많은 부정이 저질러졌다.

민주당은 투표가 진행 중인 4시 30분에 3・15정부통령선거가 전적으로 불법・무효라고 선언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 후보가 유효투표의 88.7%에 해당하는 9,633,376표, 이기붕 후보가 유효투표의 79%에 해당하는 8,337,059표, 장면 후보가 1,843,758표를 얻었다고 발표되었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장 후보가 이 후보보다 20여만 표가 더 많았고, 그 뒤 자유당에 대한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기붕이 장면보다 4배 이상을 득표했다는 것은 이 선거가 얼마나 극심한 부정선거였는가를 이승만・자유당 간부・장관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게 했다.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유권자들이 중압감에 눌려 있었는데, 항구도시 마산에서 격렬한 시위와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사전투표, 3인조 공개투표 등 갖가지 부정투표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마산시당 상급당인 경남도당은 오후 2시 무렵에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감행하여 평화적인 시위행진에 수천 명의 군중들이 호응했다. 경찰은 민주당 간부진을 강제로 연행했고, 시민들은 오후 6시 무렵에야 해산했다. 밤이 되자 학생과 시민들이 마산시청과 파출소 등지로 모여들었다. 시위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물을 뿌렸고 이에 대항하여 시위대는 돌을 던졌다.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를 발사하다가 오후 8시 무렵 실탄을 발사했다. 시내는 정전상태였고, 북마산파출소에서는 화재가 발생했다. 흥분한 군중들은 여당계 신문사인 서울신문사, 자유당선거대책위원회 등이 입주한 건물과 파출소 등을 파괴했다. 이날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연행된 이들은 격심한 고문을 당했다.

제1차 마산시위 이후 여러 지역에서 데모가 있었지만,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4월 11일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일제히 궐기했던 제2차 마산시위(상세는 별도 항목 참고)가 없었다면 3・15선거 결과가 기정사실로 되어 역사가 다르게 펼쳐질 가능성도 있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4월혁명사료총집발간위원회 편,『4월혁명 사료총집』 1책 일지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편,『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김정남 저, 『4·19혁명』 3·15의거기념사업회 편,『3·15의거사』

3ㆍ15 마산시위 (3ㆍ15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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