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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ㆍ이재호 분신 사건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은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반미의식을 일깨우는 시발점이 된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군부세력은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군대를 동원하여 총칼로 짓밟았다. 이를 계기로 사회운동진영은 광주학살이 군사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용인 하에 진행된 것이며, 미국은 군부독재의 수호자이자 배후조종자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0년 12월 9일의 광주 미문화원방화사건에 이어 19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과 강원대 성조기 소각사건, 19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등 반미투쟁은 지속적으로 확산, 심화 되었다.

1986년 3월 결성된 서울대 학생운동 비합법 조직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은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에 기초하여 투쟁의 영역을 반미자주화투쟁, 반파쇼 민주화투쟁, 조국통일 촉진투쟁으로 설정하였다. 이들은 4월 10일에 공개투쟁기구인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를 결성하고 그 산하에 ‘반전반핵평화옹호주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학 2학년생들의 전방입소 의무군사교육을 ‘양키 용병 교육’이라고 규정하며 전면적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1986년 4월 28일 아침, 교문이 폐쇄되자 전방입소 대상자인 서울대 2학년 학생 400여 명은 신림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연좌농성을 전개했다. 그들은 전날 의대 연건캠퍼스 농성이 좌절되고 26일 아침 교문이 폐쇄된 것에 항의하며 전방입소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연좌농성이 시작된 지 2~3분 후인 오전 9시 30분경, 부근 서원예식장 옆 서광빌딩 옥상에서 이 연좌 농성을 주도한 김세진(자연대 학생회장)과 이재호(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장)는 유인물을 뿌리고 “반전 반핵 양키 고홈”과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 반대”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몸에 시너를 붓고, 경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였다. 이를 무시하고 경찰이 강제 진압하러 접근하자 자신들의 몸에 불을 갖다 대었다. 9시 40분경 두 사람은 신림 4거리 양지병원에서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재호는 전신 80% 이상의 3도 화상을 입었으며, 김세진은 전신 60% 이상의 3도 화상을 입었다. 4월 29일 서울대 정치학과 학부생 및 대학원생들은 경찰 병력이 한강성심병원 주변을 포위한 가운데 병원 및 일대 영등포시장 부근에서 시위 및 연좌농성을 벌였다. 김세진과 이재호는 각각 5월 3일 오후 5시 30분과 5월 26일 오후 3시 50분경에 사망하였다. 이재호, 김세진의 분신 사건은 전방입소 거부운동과 반미운동을 전국 대학으로 확산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1989년 1학기부터 대학생 군사교육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사상이론과 조직노선을 중심으로』

김세진ㆍ이재호 분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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